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을 공부했다. 2009년 서울시 주최 ‘해치 창작동화’ 공모전과 2011년 환경부 주최 ‘나무로 만든 동화’ 공모전에 동화가 당선되어 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오랫동안 아동청소년문학 전문 기획 및 편집자로 활동하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유익하고 감동적인 책을 펴냈다. 『이회영, 전 재산을 바쳐 독립군을 키우다』는 처음 쓴 아동청소년용 평전으로, 일제 강점기에 전 재산을 바쳐 독립군을 길러 낸 우당 이회영의 삶을 담은 책이다.
“나리의 인삼을 털 조선인은 개성에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 나리를 아끼고 존경하니까요. 하지만 요즘 시내에서 활기를 치고 다니는 일본 경찰들은 다릅니다.”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조선이 일본의 손에 놀아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주둔한 일본 경찰들의 태도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조선인을 업신여기고 크고 작은 수탈을 일삼았다. 하지만 회영은 침착하게 경찰에게 인삼 사건을 신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신고를 받은 일본 경찰은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 p.32
얼마 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남몰래 회영을 찾아왔다. 그는 황실이 신뢰하는 고종의 측근이었다. “폐하의 밀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헐버트는 회영에게 황제의 백지 위임장을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이번 헤이그 특사 파견에 있어 모든 것을 믿고 맡기겠다는 황제의 위임장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고종의 믿음에 회영은 마음이 뜨거워졌다. --- p.41
“자네는 왜 조선의 독립을 원하는가?” 집으로 찾아온 독립운동가들에게 회영은 이렇게 묻곤 했다. 회영의 물음에 그들은 대부분 이렇게 대답했다.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지요.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싶습니다.” “마음 놓고 내 고향 내 땅에서 자유로이 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회영의 마음도 같았다. 그가 독립을 뜨겁게 바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유’였다. 일제의 감시와 강제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고, 독립을 얻은 뒤에 그 어떤 구속도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었다.
1867년 이조 판서 이유승 대감 댁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이회영은 가족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조선 최고의 명문가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분제 폐지, 단발령 시행, 여성의 재가 등 조선의 오랜 관습들을 버리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제의 야욕은 점점 더 커져 가고, 마침내 1907년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고종의 동의 없이 체결된 이 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고, 뒤이어 망명 정부의 수장이 되어야 할 고종마저 갑작스럽게 서거하며 결국 조선은 일제에 주권을 강탈당한다. 일제의 손아귀에 놓인 한반도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회영은 가문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가솔 50여 명을 이끌고 만주 삼원보로 망명하고, 험한 산중인 그곳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십여 년 동안 3,500여 명에 이르는 독립군들을 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