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한국인이 사는 초가집, 이건 기와집……. 이 건물은 궁궐인데 경복궁이라고 하지. 이 나무 좀 보게.” 소나무 한 그루가 늠름하게 서 있는 사진이었다. 등이 굽은 소나무 잎들은 겨울인데도 유난히 파랬다. 멋진 풍경이었다. 임금이 살았다는 궁궐은 아담한 뒷산과 잘 어울렸고, 초가집은 지붕 선이 부드러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밀러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베른 교장이 혼잣말을 했다. “코리아는 무척 매력적인 나라였어!” --- p.16
자동차가 쉬지 않고 달렸다. 드디어 만리포 해수욕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곱고 짙은 푸른색 바다, 갈매기들의 울음소리, 해안을 따라 옹기종기 둘러앉은 초가집……. “우와! 멋지다!” 밀러와 더스틴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다음 해부터 밀러는 여름휴가를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보냈다. 수영이 싫증 나거나 바닷물이 차가워지면 해수욕장 근처를 돌아다니며 주민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주민들은 한국말 잘하는 파란 눈의 밀러와 금방 말동무가 되었다. --- p.52
“여기 처음 보는 이상한 녀석이 있어. 빨리 와 봐!” 모두가 달려왔다. 밀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녀석 좀 보게. 생긴 모습은 틀림없이 호랑가시나무야. 그런데 한 나무에 여러 모양의 나뭇잎이 달려 있어. 나뭇잎도 얇아. 어서 만져 보게.” 밀러의 말처럼 일반 호랑가시나무와 전혀 다른 생김새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작은 도시 피츠톤에서 태어난 칼 페리스 밀러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힘쓰며 자신이 원했던 미 해군 동양어학교에 당당히 입학한다. 일본어를 전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이후 연합군 장교로 처음 한국을 방문하고, 지붕선이 부드러운 한국의 초가집과 순박하면서도 끈기 있는 한국인들의 모습에 매료된다. 밀러는 한국은행에 취직하며 본격적인 한국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증권업에 종사하는 동시에 외국인 관광을 유치하기도 하며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자 힘쓴다. 그리고 우연히 여름휴가에 방문한 천리포 해수욕장에서 그곳 사람들의 부탁에 6000여 평에 이르는 바닷가 모래땅을 사들이고, 평소 전쟁으로 훼손된 한국의 민둥산이 안타까웠던 그는 천리포에 수목원을 세울 계획으로 나무를 심어 나간다. 수목원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애정 또한 더욱 두터워진 밀러는 마침내 어머니의 동의와 함께 여흥 민 씨의 본관을 얻어 ‘민병갈’이라는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