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년(장수왕 54)에 있었던 교섭에는 의미심장한 일화가 나온다. 당시 북위의 실세였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의붓아들 헌문제(獻文帝)의 후궁 한 명을 고구려 공주로 맞아들이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장수왕은 “자신의 딸은 이미 출가했으니, 아우의 딸을 보내겠다”고 해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북위 측에서는 폐백을 보내기 위한 사신을 파견해 왔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 장수왕에게 충고를 했다. 북위는 북연과 혼인을 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북연에 대한 정벌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사신을 파견해 그 나라 지리를 파악한 다음 침공했다는 뜻이니, 이번 혼사도 거절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를 받아들인 장수왕은 아우의 딸이 죽었다는 핑계를 대며 혼사를 무산시켰다.
북위에서는 눈치를 채고 사신을 보내 항의하며 “정말 아우의 달이 죽었다면, 왕실의 다른 여자를 뽑아 보내라”는 요구를 해왔다. 장수왕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시간을 끄는 사이에 헌문제가 사망했고, 자연스럽게 혼사는 중지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467년(장수왕 55) 2월,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용히 마무리 지었다.
이와 같이 장수왕은 중국 남조의 송과 3북조의 북위가 대립하는 가운데 각국과 상황에 맞는 외교 관게를 맺으며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다. --- pp.14-15
고구려 사신 예실불은 북위 세종에게 “우리나라는 여러 대에 걸쳐 대국에 정성을 다해 토산물을 바쳐왔다. 이 가운데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흰 마노는 섭라(涉羅)에서 난다. 그런데 최근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다. 이 두 도적 때문에 두 물건을 구할 수가 없다”고 전했다.
예실불의 말에 북위 세종은 “고구려는 대대로 상국(上國)의 도움으로 해외에서 구이(九夷: 중국 동쪽의 아홉 오랑캐)의 오랑캐를 모두 다스려왔다. 작은 술그릇이 비는 것은 큰 술병의 수치이듯, 조공에 문제가 생긴 책임은 고구려왕에게 있다. 해로운 무리를 없애 동방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동시에, 부여·섭라 두 곳을 되찾아서 토산물을 빠짐없이 일정히 조공하게 하라는 짐의 뜻을 임금에게 전하라”고 응수했다.
이 내용에서 나타나듯이, 북위 세종이 고구려 사신 예실불을 만나 나눈 대화의 주제는 고구려에서 북위에 제공하는 공물 문제였다. 즉 고구려에서 황금과 흰 마노가 공물에서 빠지게 된 이유를 부여와 섭라의 멸망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자, 북위에서 공물이 빠진 책임을 고구려에 있으니 다른 세력을 필계로 황금과 흰 마노를 공물에서 제외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두고 “고구려가 중원 제국의 속국으로 황제 대신 동이(東夷) 여러 나라를 관할했다”고 보거나, 북위가 고구려에 대해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는 병존의 방책’을 썼던 근거라 주장하기도 한다. --- pp.25-27
642년(영류왕 25) 정월, 영류왕은 당나라에 조공 사절을 보냈다. 그리고 영류왕은 같은 해 서부(西部) 대인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천리장성 공사의 감독을 맡겼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의 세력이 강해지자 여러 대신이 견제하려고 왕과 상의해 연개소문을 죽이려 했다. 이를 미리 알아챈 연개소문은 서부의 군사를 모아 열병한다면서, 잔치를 베풀어 대신들을 초대한 뒤 모두 죽였다. 그 길로 궁궐로 가서는 영류왕을 죽이고, 왕의 조카인 장(臧)을 새 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다. --- pp.75-76
572년(평원왕 14) 5월, 『일본서기』에는 왜에 파견되었다는 고구려 사신에 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같은 해에 즉위했던 비다쓰(敏達) 천황이 부친인 선대 천황에게 사신들에 대해 보고했지만, 이들을 보지 못하고 죽은 데 대해 탄식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사신들이 바친 「조(調)」는 조사해 수도로 보내고, 고구려에서 보낸 「표(表)」를 대신들에게 주어 풀이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표」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백제 출신인 왕진이(王辰爾)가 나선 다음에야 해석할 수 있었다. 비다쓰 천황은 왕진이를 칭찬하며 다른 대신들의 노력 부족을 꾸짖었다고 되어 있다. 왕진이는 까마귀 날개에 검은 글자로 씌어 있어 읽을 수 없던 고구려의 「표」에 밥에서 나오는 김을 쐬어 비단에 그 글자를 찍어내는 재주도 보여주었다 한다. 왜 조정에서는 이를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는 내용도 추가되어 있다.
다음 달인 6월의 기록에는 왜에 왔던 고구려 사신들 사이의 갈등이 살인 사건으로 번지는 설화가 나온다. 고구려 대사(大使)가, 부사(副使) 등 아랫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물건을 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자 이를 꾸짖고 책임을 추궁했다. 그러자 이들은 처벌이 두려워 대사를 죽이기로 했다. 이 모의가 대사에게 알려졌지만, 그는 묵고 있던 곳의 뜰에서 혼자 어쩔 줄 몰라하다 자객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런 일을 저지른 고구려 사신들은, 왜 측에 “대사가 천황이 내려준 부인을 받지 않는 무례를 저질러, 천황을 위해 죽였다”고 알렸다고 기록해놓았다. 그런데도 왜 측에서는 담당관리가 예(禮)를 다해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고구려 사신들은 이 사건을 일으킨 다음 달인 7월에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다음 해인 573년(평원왕 15) 5월, 왜에 와서 정박했던 고구려 사신들의 배가 부서져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은 사태가 있었다고 한다. 그랬음에도 왜의 조정에서는 고구려 사신들이 자주 길을 잃는 상황에 의심을 품고 향응을 베풀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 pp.4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