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소설로 썼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사람들과 달리, 이 사람 - 정신이상과 비행과 어쩌면 죽음까지도 문학 덕분에 피할 수 있었던 이 사람, 모든 진정한 작가들이 그렇듯 진실을 문체 속에 지니고 있는 이 사람 - 은 간결하고 정확한 조서調書를 작성하기 위해 자신의 문체까지 포기했다. 그의 조서에는 어떤 해설도 없고, 심지어 정보조차 없다. (동생 루디는 1957년, 열 살 때 죽었다고 했는데, 왜 죽었는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정보는 오직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이름뿐이다. 어린 시절에 불행했고 청년기를 허비하고 말았다는 느낌은 흔히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모디아노의 힘은 그것을 문학으로 만들기를 거부했다는 것, 설명하기를 거부했다는 것, 아버지를 이해하려 하고 어머니를 정당화하려 하고 자신의 행위를 해석하려 하기를 거부했다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왜 중요하며 획기적인 것인가 하는 이유이다. 성찰의 거부, 페이소스의 거부, 센티멘털리즘의 거부는 이 책을 낯설게 하면서 동시에 힘을 갖게 한다. 분명 이 책에는 감정이 들어가 있고, 비극적 느낌은 모디아노의 초탈한 어투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문학이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황폐한 삶’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한탄과 클리셰와 반복된 수사를 냉정하게 되돌려주는 이러한 방식은 하나의 시위이다.
르 몽드 Le Monde
사실들, 날짜, 주소, 증거들을 빼곡이 나열하고 있는 이 책은 경찰 조서만큼이나 세세한 사실들로 꽉 차 있다. 서술이 정확하면 할수록 내용은 혼란스럽다는 역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의 기적이 아닐까. 이 책이 모디아노가 그간 쓴 소설에 대한 열쇠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이 열쇠로는 모디아노 상상력의 녹청색 문을 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으로 예순이 넘은 작가의 생애의 베일이 걷히지만, 작가의 미스터리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다. 진실은 바로 문체에 있다는 것을.
누벨 옵세르바퇴르 Nouvelle Observateur
모호함의 예술가 모디아노, 그는 지금껏 사실을 정확히 기술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작가였다. 하지만 모두의 기대와는 반대로, 모디아노는 이 책에서 자기 고백을 하고 있다. 희미함 대신 분명함을, 몽롱한 묘사 대신 보고서 같은 문체. 독자들은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인물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지역위원회에 소환되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호적에 가깝다.
르 푸앵 Le Po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