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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그마 ENIG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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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그마 ENIGMA

[ EPU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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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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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6년 0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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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6.80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23.8만자, 약 7.5만 단어, A4 약 149쪽?
ISBN13 978892558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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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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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산책을 했다. 제리코는 매번 걷는 거리를 늘려 나갔다. 처음에는 대학 안뜰에 머물다가 차츰 텅 빈 마을을 지나 지금은 꽁꽁 얼어붙은 교외까지도 드나들었다. 그리고 석양이 질 때쯤 집에 돌아와서는 가스난로 옆에 앉아 셜록 홈스를 읽었다. 이제는 저녁 식사도 홀에서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귀빈용 식탁에 앉으라는 학장의 제안은 정중히 거절했다. 음식은 블레츨리만큼이나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환경은 훨씬 좋았다. 촛불이 프레임이 넓은 액자 속 초상화 위로 깜박였고, 기다란 참나무 식탁 위로 화려한 빛을 뿌려 주기도 했다. 교직원들의 호기심을 모르는 척하는 법도 배웠다. 행여 대화를 청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가볍게 거절했다. 외로움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건 그의 삶이었다. 의붓아들 출신에 천재인 제리코에게는 남을 밀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과거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다를 떨 수가 없었고, 지금은… 비밀이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30쪽)

패슨과 그레이저. 제리코는 그들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패슨은 중위였고, 그레이저는 건장한 이등병이었다. 그들이 타고 있던 구축함은 동지중해에서 유보트 한 척을 잡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폭뢰를 써서 잠수함을 수면으로 떠오르게 만든 때가 오후 10시. 파도가 거칠었고 바람이 거셌다. 독일군 생존자들은 잠수함을 버리고 달아났고, 두 명의 해군은 옷을 벗고 탐조등 불빛을 따라 잠수함으로 헤엄쳐 갔다. 유보트는 기관포 사격으로 사령탑에 구멍이 뚫렸으며 이미 침몰하던 중이었고, 때문에 주변의 소용돌이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전실에서 비밀 서류 한 묶음을 가져와 해변에 정박해 있던 수색대 무리에게 넘겼다. 그들이 다시 에니그마를 가지러 갔을 때, 유보트는 이물을 쳐들고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아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도 잠수함과 함께 수심 1킬로미터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8호 안가에 그 얘기를 전해 준 해군은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바닥에 닿기 전에 숨을 거두었으면 좋으련만….” (43~44쪽)

제리코는 이후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왜 그런 식으로 행동했던 걸까? 피곤해서? 아니면 안락한 케임브리지에서 갑자기 악몽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바람에 분별력을 잃었던 걸까? 아직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서? 차라리 비정상이었다면 나머지 일들을 설명하기는 편할 것 같았다. 아니면 클레어 때문에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던 걸까?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는 것뿐이었다. “넌 얼굴마담으로 온 거니까.” 넌 머릿수만 채우면 되는 거야. 스카이너는 양키들 앞에서 선한 양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견해를 말하지도 말고 질문도 집어치우란 말이야. 제리코는 역겨웠다.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등화관제도 지겨웠고 추위도 지겨웠고 몰상식하게 이름이나 불러 대는 촌스러운 동료들도 지겨웠고, 라임 냄새와 습기와 고래 고기도 역겨웠고 지겨웠다. 세상에, 새벽 4시에 고래 고기라니…. (114~115쪽)

“오해하지 마세요. 전 여기 온 지 한 달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톰, 당신들이 해 놓은 일에 충분히 감탄하고 있습니다. 놀랄 만한 업적이죠. 우리 쪽 어느 누구도 지휘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요점은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봄베도 부족하고 타자수도 부족합니다. 더욱이 저 창고 같은 소굴이라니. 세상에! ‘아빠, 전쟁이 위험하지 않았나요?’ ‘위험했지. 난 얼어 죽는 줄 알았단다.’ 색연필이 모자라 작전이 완전히 멈춘 적도 있다는 사실 아십니까? 제 말은 중요한 게 뭐냐는 거예요! 색연필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죽어 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제리코는 너무 피곤해서 말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게다가 그 얘기는 사실이었다. 크레이머의 지적은 옳았다. 18개월 전의 어느 날 밤이었다. 제리코는 숄더 오브 머튼 여관에서 낯선 사람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가 불 꺼진 문 옆에 서 있는 동안 튜링과 웰치먼과 몇몇 부서장들은 2층에 모여 처칠에게 연대 편지를 쓰고 있었다. 지금과 비슷한 얘기였다. 사무원 부족, 타자수 부족 등등…. 특히 봄베를 제조하는 레치워스의 공장 ─ 우습게도 옛날엔 이곳에서 금전 등록기를 만들었다 ─ 에서도 부품과 인력이 모두 부족했다. 처칠이 편지를 받고 한 번 뒤집어지기는 했다. 다우닝스트리트에서 싸움이 있었고, 몇 명이 옷을 벗었고, 기계가 거꾸로 뒤집어졌다. 한동안 상황이 좀 나아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블레츨리는 기본적으로 탐욕스러운 아이였다. 먹으면 먹을수록 식욕만 늘었다. “전쟁은 돈지랄”이란 말이 있었고, 백스터도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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