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예술과 권력 그리고 서울
한 건축가의 소신_세종문화회관
서울시민은 물론이거니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직접이든 대중매체에서든 최소한 한 번쯤 보았을 세종문화회관. 기념비적 건물을 지으라는 박정희 정권의 요구에 따라 1978년 완공된 공연·전시·회의 시설로, 수도 서울의 중심 도로라 할 수 있는 세종로 한복판에 있어 만만치 않은 입지를 자랑한다. 한옥에서 차용한 세종문화회관 구조는 여느 건물과 다른 느낌을 준다. 마치 한옥의 안채와 별채처럼 본관과 별관을 배치하고 둘을 이어주는 회랑을 조성했다. 줄지어 선 튼실한 돌기둥에 두꺼운 추녀, 완자문양을 가미한 벽장식은 고건축과 현대건축 간의 조화를 이뤄내려는 듯 다채롭다.
그런데 세종문화회관은 하마터면 지금보다 더 육중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들어설 뻔했다. 건립 당시 청와대가 최소한
5,000명이 들어가는 대회의실을 갖출 것과 기와지붕을 얹어달라고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평양의 인민문화궁전이나 만수대예술극장 같은 거대한 ‘민족전통주의’ 건축물들을 의식한 탓이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대, 권력의 주문을 뿌리치기 쉽지 않았을 테지만 세종문화회관은 끝내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 건축가가 “그것은 평양의 특징일 뿐 우리는 우리대로 만들어갈 문화가 있다”라며 거절해 지금 우리가 보는 선에서 일단락 되었다.
건축가는 “건축은 시대의 상징이자 변이이다. 건축 기술이 발달해서 기와를 씌우지 않고도 우리 정서가 들어가는 전통을 살릴 수 있다. 건축가에게 맡겨달라”라고 했다. 전통 기와를 얹고 서까래를 올린다고 해서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자칫 규모에만 집중할 경우 덩치만 큰 관제 건축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건축가는 바로 지난 2012년 향년 93세로 타계한 엄덕문이다.
한국 현대건축가 1세대에 속하는 엄덕문은 1962년 완공한 국내 첫 대단지 아파트인 서울 마포아파트와 경기도 과천 종합정부청사 설계자이기도 하다. 서울의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 리틀엔젤스 예술학교도 그의 손을 거쳤다. 개인 주택도 그렇지만 대형 공공건축물을 지을 때도 건축주와 건축가가 갈등할 수 있다. 건축물의 세세한 부분만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상징성과 의미, 그리고 정치적인 목적 등에서 견해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고 있는 공공건축물들에서는 시대정신을 담기 위한 고민의 흔적을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흔하디흔한, 한창 유행인 유리-철골 구조의 색깔 없는 건축물들 일색이다._42~45쪽
2장 사라져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
궁궐을 정원으로 삼은 집?_창덕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창덕궁은 일 년 내내 수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다. 그 위상에 걸맞게 궁궐 내부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뒤쪽에 자리 잡은 후원 역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조선의 전통 조경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창덕궁 바깥으로 시선을 옮기면 사정이 달라진다. 돈화문에서 창덕궁 왼쪽 담장을 따라 북촌 쪽으로 걷다 보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2층짜리 주택 한 채가 궁궐 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 보호 의식이 희박하던 1960년대에 창덕궁 관리소장 관사로 들어선 건물이다. 이후 1980년대 초 민간인에게 팔리면서 지금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형국이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사무소 측은 “민가를 매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소유자와의 의견 차이로 매입 계획이 순탄치만은 않다”라고 말한다.
그 건물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아예 대놓고 창덕궁 담장을 훼손하는 건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창덕궁 담장을 개인 주택의 담장으로 활용하거나 아예 창덕궁 담장을 벽으로 삼아 그 위에 지붕을 얹어 방이나 창고로 쓰는 경우마저 있다. 개인 주택에 가까운 창덕궁 돌담 중에는 궁궐 바깥쪽으로 흙이 무너져내려 붕괴 위험이 엿보이는 곳도 여러 군데다. 쓰레기나 폐건축자재를 방치해둔 것 정도는 도드라져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같은 혼돈의 시기를 거치면서 개인들이 마음대로 공간을 침범하거나 셋방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또 관련 공무원들이 불법으로 몰래 팔아버린 결과다.
문화재는 지속적인 관심을 갖지 않으면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미 개인 사유지로 변한 곳은 손쓸 방도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방치해두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조선왕릉의 경관 또한 주변의 건축물이나 축사 때문에 훼손되어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창덕궁의 제모습 찾기가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여행자들이 찾는 창덕궁 내부만 가꾸고 정비할 것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정성 어린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_90~95쪽
3장 그날의 현장을 찾아서
최후의 바리케이드_유진상가
서대문구와 은평구 사이의 홍은동네거리에 가면 세운상가를 닮은 상가형 아파트를 만날 수 있다. 1970년 들어선 ‘유진상가’다. 동서 방향 길이가 200미터 남짓, 폭은 50미터 정도로 얼핏 봐도 상당히 육중한 모양새인데, 1층 전체와 2층 일부는 상가로 쓰이고 나머지는 주거용으로 이용되는 초기형 주상복합아파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이 눈에 띤다. 1층의 남북쪽 면에는 그저 기둥만 세워져 있을 뿐 하나같이 비어 있다. 나중에 비워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한 것이다. 군사적인 목적 때문이다.
유진상가가 들어선 홍은동사거리 일대는 만약 북한군이 구파발을 돌파해 남하할 경우 서울의 마지막 방어선에 속한다. 거기가 뚫리면 무악재 너머로 바로 청와대를 비롯한 서울 한복판에 다다를 수 있다. 당국으로서는 북한군 전차에 대응할 수 있도록 튼튼한 진지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유진상가는 유사시 탱크 진지로 활용하기 위해 1층의 바깥부분을 모두 비워두었다. 북한군의 곡사화기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기둥 사이의 폭과 높이를 탱크 한 대가 쏙 들어갈 만한 규모로 설계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당시 서울 시내의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 단위면적당 많은 콘크리트와 철근을 넣어 튼튼하게 지었다. 만에 하나 후퇴해야 할 경우 한쪽 기둥만 폭파하면 건물 전체를 동서 방향으로 길게 쓰러뜨릴 수 있는 치밀한 설계도 잊지 않았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리케이드이자 참호, 대전차 장애물이었던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상가가 지어지기 직전 한국은 한마디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우이령길을 닫게 한 1968년 1·21사태에 이어 그해 말에는 울진과 삼척 지역에 북한 무장공작원들이 침투하기까지 했다. 박정희 정권이 유사시 수십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해 남산 1~2호 터널을 파고 청와대 방어를 위해 북악스카이웨이를 뚫는 등 이른바 ‘서울 요새화 사업’을 벌인 이유다. 오늘날 유진상가나 남산터널, 북악스카이웨이를 두고 지난 시대의 남북 대결을 떠올리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남북의 대치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지만 말이다. 서울 곳곳을 걸으며 지나간 시대, 그러나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산적한 이 땅의 현실을 생각해본다._196~199쪽
4장 함께 사는 서울을 꿈꾸며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터의 운명은?_종로구 송현동
광화문에서 인사동 입구 쪽으로 걷다 보면 왼쪽으로 높다란 담장이 나온다. 성인 키의 두세 배를 훌쩍 뛰어넘는 높이라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힘들다. 이곳에는 얼마 전까지 주한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있었다.
3만 7000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이 땅을 두고 2008년 이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부지를 사들인 대한항공이 자칭 ‘7성급 호텔’을 짓겠다고 나선 탓이다. 정부도 관광진흥법 개정을 추진하는 등 맞장구를 쳤다. 서울 옛 도심의 중심, 특히 경복궁과 가까운 곳에 고급호텔이 들어서면 고용 창출에 기여할 수 있고 관광산업 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참교육학부모회 등 시민단체들의 생각은 다르다. 부지 바로 옆에 덕성여중고와 풍문여고가 있어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는 그런 주장이 먹혀들었다. 2010년 대한항공이 서울중부교육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지만 대법원까지 올라가 결국 기각당했다. 현행 학교보건법상 학교 정문이나 후문에서 직선거리로 50미터 이내의 절대정화구역에는 호텔이나 모텔, 여관과 같은 숙박시설을 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만 들여다봐도 7성급 호텔이 고용을 창출하는 등 사회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정부 주장은 논리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4년 6월 경실련이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자료를 활용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호텔 건립으로 늘어나는 일자리라고 해봐야 저임금의 임시·일용직 일자리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호텔 등 숙박업계의 월별 노동시간은 전체 업종 대비 14시간이 더 많은 190.3시간에 달하지만 정작 임금은 75.1퍼센트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임시·일용직 비율이 79.2퍼센트에 달하며 100만 원 미만의 저임금 노동자 비율 또한 33퍼센트나 돼 숙박업계의 노동조건이 다른 업종에 비해 매우 열악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실련이 “정부는 호텔 건립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언급하기 전에 현 호텔업의 근로조건부터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근거다. 그리고 관광산업 경쟁력은 호텔 숫자가 아니라 잘 보존된 역사문화 경관이 보장해준다. 이는 해외 사례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문제의 땅은 구한말 이래 늘 ‘손님’의 땅이었다. 1920년경 들어선 조선식산은행 직원 숙소가 그 시초다. 조선식산은행은 지금의 산업은행처럼 산업금융을 담당했지만 실상은 조선총독부의 외곽 기구에 가까웠다. 해방 뒤에도 굴곡진 운명은 이어졌다. 미군정 시설을 거쳐 2000년대 초반까지 주한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쓰인 것이다. 만약 거기에 고급 호텔까지 들어서면 소수의 이용객을 제외한 일반 시민의 접근은 앞으로 더더욱 힘들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공공의 이익보다 사유재산권을 우선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제3자가 남의 땅을 두고 이래라저래라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정부는 관련법 개정에 나서는 등 자본의 요구에 앞장설 것이 아니라 기업과 시민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 예부터 송현동 일대는 동서로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고 남북으로는 인사동과 북촌을 이어주는 역사와 문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왔다. 그러던 곳이 일제강점기와 개발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낱낱이 훼손되어 민비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감고당이나 세종 때 처음 지어진 안동별궁의 흔적은 아스라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터마저 자본의 논리에 밀려 바람 앞 등불 신세가 되어버렸다._342~347쪽
5장 변화의 기로 위에서
‘조선철도호텔’ 이후 100년_웨스틴조선호텔
지금은 사라진 인천 제물포의 대불호텔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근대적인 호텔업이 시작된 이래 개업 100주년을 맞은 호텔이 있다.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이다. 이 호텔의 처음 이름은 ‘조선철도호텔’로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문을 열었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한 지 5년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른바 ‘시정始政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면서 귀빈들의 숙박을 위해 지은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주관이 되어 지은 데다 당시 철도는 정시 운행과 기계 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성의 상징과도 같았기에 호텔 이름에 굳이 ‘철도’라는 말을 넣은 대목이다. 조선인에게 조선은 낡고 후진적인 데 반해 일본은 근대화된 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하고, 일본 덕에 조선의 근대성이 배가되고 있다는 정치 선전을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용도와 이름이 바뀐 건 해방 뒤였다. 미군정청은 조선철도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했고, 이후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이 집무실을 두었다.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에는 배일정책의 일환으로 호텔 이름을 ‘조선호텔’로 바꾸었다. 1958년 8월 화재가 난 이후 1970년 들어서는 20층 규모의 현대식 호텔로 재탄생했고, 1981년 미국의 웨스틴호텔즈와 제휴하면서 ‘웨스틴조선호텔’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이런 길고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유한 웨스틴조선호텔이 2013년 7월 ‘더 메모리 오브 1914’라는 이름의 행사를 열었다. 1914년 10월 10일 개업한 것을 기념해 ‘100년 전으로 가는 100일간의 미각여행’ 같은 다채로운 100주년 기념행사들이 연이어 열렸다.
그 행사들을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이 땅의 역사가 참으로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스틴조선호텔 레스토랑에서 내다보이는 정원이 평범한 호텔 정원이 아니라 조선이 황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한, 즉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위해 만든 환구단 터였기 때문이다. 비록 반향 없는 일방적 외침에 불과하긴 했지만….
일제는 조선철도호텔을 만들며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극히 소수의 건물만 남긴 채 환구단 시설을 거의 헐어버렸다. 그나마 남은 것이 황궁우와 석고(돌북) 정도인데, 웨스틴조선호텔은 그 공간을 그저 정원 정도로만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개업 100년이라는, 국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호텔의 역사를 맛으로 기억하는 것을 넘어 그 안에 서려 있는 더 깊은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기대한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_404~407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