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우한 가정에 태어나면서부터 십대 중반까지 늘 잔병치레만 하고 살았다. 특히 일곱 살 되던 해 초여름 이질에 걸려 삼복더위를 지나 넉 달 남짓 앓던 중 앉은뱅이가 되어 사경을 해매다 서리가 하얗게 내리는 늦가을에야 걸음마를 다시 시작, 천우신조로 되살아난 것이다. 나의 투병기간 동안 아버지는 가정불화까지 겹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가을 35세의 청춘에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기구한 팔자에 홀로된 어머니는 한탄할 겨를도 없이 광주리장사로 우리 삼남매를 기르셨다. 아무리 가난했어도 나에게는 농사일을 비롯해 어떤 일도 시키지 않고 중학교에 다니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도록 종용했던 것이다. 이는 어머님이 그 당시 한글을 통달하셔서 고전소설을 많이 읽으신 식견이 있었기 때문에 ‘서당 강아지 삼 년에 풍월한다’는 옛 고사의 지혜를 얻고자 함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초등학교 6년을 졸업하고 중학강의록으로 독학의 길에 들어서서도 놀기는 동네 중학생들 틈에 끼어 놀았고, 그 친구들이 읽는 책을 빌려 독서의 습관을 들였으므로 오늘날까지도 독서는 나의 생활습관으로 굳어졌다. 또한 나의 초등학교 5, 6학년을 가르쳐 주신 고 안용덕 선생님 역시 가난했으므로 겨우 초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교사자격을 취득하여 우리를 가르쳤으며 몇 년 후 중고등학교 영어교사 자격을 각각 취득하여 40여 년의 교직을 마칠 때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셨다. 이 모든 과정을 선생님은 독학으로 일구어 낸 것이다. 정년퇴임 후 선생님은 중고등학교 영어입시 참고서로 ‘우선순위 영단어’시리즈 5종을 출판하셨는데 이것이 베스트셀러로 선정, 한 해에 수십만 부씩 팔림으로써 교육계에서는 혜성처럼 빛난 선생님이셨다. 나는 이토록 유명한 선생님을 나의 멘토로 섬겼으므로 은사님처럼 대성은 하지 못했지만 비록 작은 자리나마 국가공무원으로 36년간을 봉직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선생님이 나에게 미친 영향이 절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 어머님의 자식사랑과 지혜가 비록 병약한 아들이었지만 나의 잠재능력을 간파하시고 스스로 헤쳐갈 수 있도록 장래를 유도해주셨으니 맹모삼천지교에 비견할만한 현모이심이 분명하다.
그리고 늦깎이로 서른 살이 되어서야 체신부 임시직에 취직되어 겨우 7개월밖에 근무하지 못하고 연말에 조건 없이 해고되어 2달 반 동안 정직되었던 쓰라린 경험을 한 후에야 요행히도 복직되었으며 뒤이어 곧 정규직으로, 3개월 후에는 일반행정직 전형시험에 합격, 행정서기보로 발령받으니 불과 6개월 만에 임시직에서 행정서기보로 파격적인 신분상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후 행정서기보로 5년, 행정서기로 5년 해서 10년을 평직원으로 근무했으며 행정주사보로 5년과 행정주사로 20년을 근무하는 동안 계장급으로 3년과 우체국장으로 22년을 근무하고 정년퇴임했다.
재직 중에 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탐독함으로써 청빈한 근무태도를 견지하여 월급 외에는 물욕을 부리지 아니하였고 포상으로는 장관 표창 3회를 수상하였으며 정년퇴임 시에는 옥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나의 경력은 남들처럼 화려한 고관대작의 높은 자리에 올라 가문을 빛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부정을 범하지 않아 조상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았음을 적이 위안으로 삼고 있다. 나의 순탄치 못한 지난 세월을 회고해 보면 희로애락이 교차 부침하여 만감이 새롭다. 곧 넘어질 듯 뒤뚱거리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칠전팔기로 어언 팔순을 훌쩍 넘긴 고령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나님의 큰 은덕으로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여생을 얼마나 이어갈지는 모르되 사는 날까지는 겸손한 자세로 아름답게 살다가 고종명하여 생을 마감했으면 한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일곱 손자녀에게 특별히 유산으로 물려줄 것은 없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할아버지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이 회고록을 출판함에 있어 정성껏 수고해주신 권선복 대표님과 직원 일동에게 감사를 드리며 출판물의 원고 작성의 측면에서 도와준 원미화에게도 감사한다. 또한 내 아들 경호와 자부 범정윤, 딸 정희와 사위 고재섭의 지원에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