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 대한 소문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빠에게 “내 인생이니 간섭 마요.”라는 말을 날리고 끝끝내 자유를 얻어 냈다. 아빠와 새엄마는 내 사생활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고, 나는 그 덕분에 평범한 대한민국 중학생이 누릴 수 없는 엄청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몬스터와 엮이면서 사실 내 삶이 하나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때가 왔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된다.
애들은 대체로 나를 골 빈 놈으로 치부했다. 골이, 사는 데 별 지장 없는 지식들로 꽉 차 있는 것보다 어느 정도 비어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빈 공간에 사는 데 꼭 필요한, 이를테면 파란 하늘, 붉은 노을, 새털구름, 안개 낀 아침, 보슬비, 드넓은 바다, 단풍 든 나무, 낙엽 떨어진 거리 등등을 채워 넣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 아닌가? --- p.12~13
문득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난생처음. 모두의 왕따 몬스터는 뜻밖에도 소신 있게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몬스터는 시시콜콜한 것에 연연해하지 않았고, 누구보다 당당해 보였다. 난 그게 부러웠고 한편 자존심이 상했다. 따지고 보면 누구도 몬스터한테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었다. --- p.50
원시인? 병시인?
내가 시에 꽂힌 건 역사가 그리 길진 않았다. 유치원 때부터 짝사랑했던 미현이와 사귀게 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 갑작스럽게 차이고 헛헛한 마음속에 시가 들어왔다. 몇 줄의 시가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더니 이내 소용돌이쳤다. 나는 시의 강력한 힘에 매료되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시를 읽고 마음에 드는 시를 공책에 베껴 적었다. 학교에서, 지하철에서, 도서관에서, 시집을 읽고 있는 사람을 목격하기란 우리 반에서 휴대폰 없는 학생을 찾는 것만큼 어려웠다. 가끔 사람들이 돌연변이를 보듯 시집을 읽고 있는 나를 힐끔거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가끔 외롭고 슬픈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 p.75
나는 하루 종일 습작에 매달렸다. 쓰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쳤다. 시는 토씨 하나를 바꿔도 행갈이 하나에도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나는 예민하고 까칠한 시를 데리고 노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종종 노후화된 아파트의 층간 소음과 냉장고 골골대는 소리와 엄마가 시를 낭송하는 소리 때문에 방해가 되었지만 시랑 함께하는 시간이 더없이 좋았다. 반면, 학교에서는 늘 졸음이 몰려왔다. 애들은 게임이나 야동 탓이라고, 병시인이 지랄 떤다고 떠벌렸지만 무시했다. --- p.84
열일곱, 최소한의 자존심
아빠가 운영하던 합기도 도장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뒤 모든 불행이 몰아닥친 것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집 나간 엄마, 몇 달째 월세를 못 낸 허름한 연립 주택, 진절머리 나는 빚 독촉, 노숙자 꼴을 하고 있는 아빠, 방치되고 있는 허리 디스크, 잔고가 바닥난 통장. 하지만 나는 이 시간을 버텨 내기로 맘먹었다. 죽지 않을 거면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나에게도 꿈이라는 게 생겼기에!
오늘처럼 야자가 없는 날과 주말에는 항상 동네 뒷산에 올랐다. 숨 가쁘게 오르고 정상에서 토해 내는 숨. 그 느낌이 미치도록 좋았다.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역기를 들다 보면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땀이 빠져나간 자리마다 꿈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자살 충동을 느끼던 나한테도 꿈이라는 게 생겼다. 언젠가 정자에 앉아 명상을 하고 기 운동을 하다가, 어렴풋이 경호원이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킨다는 건 가장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일 아닐까. 난 그 실낱같은 꿈을 놓치지 않으려고 음식물을 섭취했다. 음식물은 꺼졌다고 생각한 초의 심지에서 희미하게 피어나는 불이었다.
--- p.107
엄마가 돌아왔다
난 어릴 적 주구장창 한 가지 소원만 빌었다. 엄마가 돌아오게 해 주세요. 엄마랑 함께 살게 해 주세요. 며칠 전에도 별똥별님한테 소원을 빌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덜컥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세상이 환했다. 이제 ‘1. 엄마랑 잘 지내는 게 낫다’와 ‘2. 엄마랑 남처럼 지내는 게 낫다’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지만 사실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엄마가 오기 전까진 목에 추를 달고,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머리에 철모를 쓰고 마라톤 경기에 나선 것처럼 몸과 마음이 지치고 무거웠다. 하지만 오늘은 쉬는 시간, 점심 시간, 수업 시간 할 것 없이 홀가분했다. 급식 시간에는 식판이 흘러넘치도록 밥을 펐고, 밥 양을 보고 배식하는 아줌마들이 돼지 불고기를 듬뿍 얹어 주었다. 행복했다. 나한테도 이런 복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이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는 욕심이 물결쳤다. --- p.128
쉬즈 곤?
사실 까놓고 말해 경쟁이라는 말 자체가 자존심 상했다. 서른일곱 살이나 먹은 노총각에, 축 늘어진 젖살과 똥배, 짧은 다리, 돋보기에 가까운 보이는 안경. 나는 처음에는 가진 자의 여유로 저승사자의 애처로운 구애를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고 동료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분위기라면 상황 역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민 노래자랑은 나에게 하늘이 내려준 굵은 동아줄이었다. 기필코 일등을 해서 저승사자의 기세를 완전히 꺾을 생각이었다.
“한남고 꽃미남 노재광! 아자아자, 파이팅!”
관중석에서 나는 소리였다. 저 멀리서 ‘용 됐다! 스타 탄생 노재광’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흔들고 있는 기석이와 상태가 눈에 띄었다. 아니 반 애들이 모두 몰려온 것 같았다. 순간 가슴이 찌릿했다. 기필코 1등을 먹어서 그녀와 엄마 선물을 사고 나머지는 멋지게 쏘리라. 기다려라, 새끼들아!
--- p.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