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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원권 지폐에 적혀 있는 기호와 번호였다.
A자가 세 개인 트리플이며, 가운데 0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되는 양 날개 레이더이며, 0과1이 반복되는 지그재그 레이더였다. 이른바 슈퍼 레이더 시리얼 넘버 Super Radars Serial Number였다.
비현실적인 자외선램프 빛 아래, 나란히 누워 환상처럼, 거짓말처럼 빛나고 있는 일월오봉도와 용비어천가를 보면서 아마추어 지폐 수집가 정은서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감을 느꼈다. 두 장에 똑같은 번호가 찍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아마추어라고 해도 명색이 지폐를 수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위조지폐 감별법부터 익히게 마련인 법. 은서의 지폐에 대한 지식도 전문가에 못지않은바, 미세문자, 홀로그램, 숨은 그림, 앞뒤 맞춤, 볼록 인쇄, 점자는 물론 요판잠상, 색 변환 잉크를 뛰어넘어 형광인쇄까지! 눈앞의 지폐는 두 장 모두 진폐였다. 적어도 은서의 눈과 지식으로는 그랬다. 믿을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폐공사에서 두벌을 찍었단 말인가!
두 장 중 한 장은 위폐다! 생각하고 들여다봐도 도저히 구별할 수 없었다.
누가 만들었을까?
과연 그 사람은 누구일까?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한 번쯤은 꿈꾸었을 미다스의 황금 손!
은행 금고도 퍼내면 마를진대, 퍼내도 다시 차오르는 화수분!
종이를 황금으로 바꾸는 현대의 연금술을 완성한 사람!
무한한 돈에 대한 인간의 꿈을 실현한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
“돈을 만들겠다고?”
“네. 도와주시면 얼마든지 똑같이 만들어 내겠습니다.”
“못 만들 것도 없다만, 돈을 만들려면 먼저 돈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할 게 아니냐?”
“공업생산품일 뿐이지요. 조폐공사도 만드는데 우리가 못 만들 이유가 없잖습니까?”
“쯧쯧, 쯧쯧, 그런 생각으로 어떻게 제대로 된 돈을 만들겠느냐.”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그럼 저 벽에 붙어 있는 글부터 읽어 봐라.”
“예배자 경야복야 모경진성 굴복무명(禮拜者 敬也伏也 慕敬眞性 屈伏無明). 무슨 뜻이 온 지요?”
“부끄러워할 거 없다. 읽은 것만 해도 가상하다. 서산대사가 편찬한 선가귀감이란 책에서 나온 말이다. 예배는 공경이며 굴복이다. 참다운 마음을 공경하고 어리석음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라는 뜻이지. 종교인의 기본자세에서 더 나아가 종교의 근본 존재의미를 설파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성언이다. 네가 만들고 싶은 지폐를 그 밑에 붙이고 절을 해라. 너의 신은 돈이니, 돈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까지 절을 하고 공경해라. 돈에 대한 무지가 깨어져 돈의 진면목을 깨달을 때까지, 돈 앞에 겸손해질 때까지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만큼 잘 만들라는 말씀 아닙니까?
“갈 길이 멀 구나. 돈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멍청한 놈 잡아오라니 가난한 놈 잡아왔다는 옛말이 있다. 그만큼 돈은 인간의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인 동시에 기회와 권력인 것이다. 기회도 돈이 없으면 잡을 수 없고, 돈이 없으면 권력도 껍질일 뿐이다. 돈을 우습게 보면 절대로 너는 진짜 돈을 만들 수 없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과 약속에 불과한 형이상학적인 존재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제대로 된 돈을 만들 수도 없고 또 만든다 해도 그 돈이 너를 죽이는 칼이 될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