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으로 항일 여론이 거세지자 9월 23일, 당시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는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했다. 10년간 치열한 내전을 벌였던 국공 양당은 공동의 목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제2차 합작을 실현했다. ---「제1장 핑싱관(平型關)에서의 첫 승리」중에서
이소가이 사단은 탄약, 휘발유가 모두 떨어지고 기동 차량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움직일 수 없어 부득이하게 이 현(?縣)으로 철수했다. 인원조사 결과, 이소가이 사단은 모두 1만 7천여 명의 병사를 잃었다. ---「제2장 타이얼좡(臺兒莊) 전투」중에서
중일전쟁 발발 후, 정면 전선에서 중국군이 연이어 패배해 화베이, 화둥, 화중, 화난 등 광대한 지역이 점령되면서 중화민족은 생사존망의 위기에 몰렸다. 중공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는 신사군을 통일된 전략에 따라 배치해 독립적·자주적인 유격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제3장 적후(敵後) 유격대」중에서
서둘러 중일전쟁을 끝내고 더욱 큰 규모의 태평양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에 대한 유인 정책을 강화했다. 동시에 ‘자오이[棗宜, 자오양-이창(棗陽-宜昌)] 전투’를 일으켜 이창을 점령하고 쓰촨(四川)으로 진격해 관문을 열게 함으로써 시안, 충칭, 쿤밍을 공격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