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생. 시인. 수필가.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공군학사장교로 미공군 비행장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태평양 너머 캐나다로 건너갔다. 4년간의 짧지만 감당하기 힘든 실패와 아픔을 경험하고 귀국했다. 학생들에게 기억되는 선생으로 남길 바라며 10년 넘게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쳤고,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허리에 힘이 생겼다. 느리게 뛸 수도 있게 됐다. 때로는 바람과 손잡고 마음의 빈 공간에 꽃잎 하나 떨구며 천천히 자유로움을 음미하기도 했다. 길 위에서, 헝클어진 과거의 추억을 정리하고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통해 사회를 위한 대안을 모색해 왔다. 현재, 계산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가족과 함께 무지개를 바라보며 길을 걷고 있다.
제주사회는 아주 좁았다. 새로 만나는 토박이들에게 제주에서 만난 지인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다. 심지어 내가 모르는 사람조차 제주에서 3년도 채 살지 않은 나를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육지인으로서 좋지 않은 인상을 주면 제주 사회에 정착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경계 받고 탐색 당하는 이방인의 입장에서 토박이에게 좋은 인상만 주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토박이의 입장에서도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오랫 동안 살다보니 육지에서 들어온 이방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 p.45
어느 날 아침, 바지를 입다가 허리가 꺾이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결혼할 때부터 자주 허리가 아파 고생을 하면서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았다. 임용고사 시험공부를 한다고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 의자에 앉아 책을 봤더니 목과 허리에 통증이 잦았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그날 나는 몇 시간을 그렇게 바닥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가 결국에는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갔다. 그때부터 의자에 앉는 것이 힘들었고 병원을 찾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임용고사 준비를 포기했다. 다시 한 번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7개월 된 아들의 얼굴이 계속 눈에 밟혔다. --- p.141
도전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아무런 도전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냥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건강하고 젊다면 히말라야 산에 올라 호연지기를 느낄 수도 있겠다. 가끔은 기약 없이 여행하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번지점프대에서 뛰어내려 보는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호주의 해안 도로를 타고 한 바퀴 도는 것은 어떤가. 아니면 미대륙을 횡단하는 것도 좋지 않은가. 만리장성에 오르면 대장부가 된다는데, 아프리카 희망봉에 오르면 어떤 기분일까. 알래스카에서 오로라를 보면 무슨 생각이 떠오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