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봄날의 호랑이로 태어났습니다. 책벌레였고, 화가가 꿈이었던 어린 시절을 거쳐 작가가 되었습니다. 사실, 해적이나 뱃사람도 되고 싶었지요. 지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내 지하실의 애완동물』 『멸종 직전의 우리』 『꿈꾸는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등이 있습니다.
“우리, 곧 여기서 달아날 거야.” 탈출 계획을 일러준 이는 한나였다. 홍 판서댁 딸이 시집가는 날을 거사 일로 삼았다고 했다. “구야, 너도 같이 갈래?” 구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거기 가면 그림도 그리고, 배불리 먹을 수도 있어.” 나고 자란 땅을 떠날 결심을 하긴 어려웠다. 주막집 헛간에서 한참을 뒤척였다. 만약 네덜란드 선원들이 모두 떠나버리면, 구야는 또다시 혼자가 된다. 더 이상 홀로 남겨지는 건 싫었다. 한나가 떠난다. 단 하나뿐인 단짝 동무였다. 염라댁의 머슴으로 평생을 살 생각은 없었다. 붓 한 번 못 잡아보고 빗자루질만 하다가 야산 중턱에 묻히긴 더욱 싫었다. 구야는 네덜란드인들에게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내쳐졌다. 입조심하고,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핌은 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못마땅해하는 네덜란드 선원들을 위해 배도 수소문했다. 그렇게 조선을 떠났는데, 낯선 일본 땅에서 붙잡히다니. 애초에 조선 땅을 떠나온 게 잘못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길도 없었다. 구야는 막막한 마음으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 p.51
칠면조 노인은 궁둥이를 붙이고 한 풍경만 보는 건 질색이라고 했다. 화가는 구름처럼 흘러다니며 땅은 종이로 발은 붓 삼아야 한다는 거다. 그는 정해진 거처도 없이 민들레 홀씨처럼 떠돌아다니는데 기회만 된다면 세계 유람을 하고 싶다고 했다. 독토르가 보여준 세계지도가 떠올랐다. 지도를 보면 세상에는 정말 많은 나라가 있다. 조선은 지도에서 새끼손톱만 했다. 데지마는 벼룩이었다. 구야가 태어나고 자란 곳, 지금 있는 곳은 모두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지도는 구야에게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종이 한 장이 구야 앞에 넓은 세계를 펼쳐주었다. --- p.92
희망봉. 위도도의 ‘고래’와 티셰의 ‘진수성찬,’ 구야의 ‘그림’도 희망의 다른 말이었다. 티셰는 네덜란드에 도착해 갖가지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앉은 모습을 상상하며 허기를 달랬다. 위도도는 작살이 꽂힌 고래를 항구까지 끌고 가는 꿈을 꾸며 펌프질을 했다. 구야는 카피탄 집무실의 벽에 걸린 화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네덜란드로 가서 그런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희망은 빌지의 쥐들이 살아갈 밑천이었다. --- p.136
졸리 로저 기 덕분에 한시름 놓았지만 그림 그리는 것이 날로 시들해졌다. 상상도 하지 않고, 공도 들이지 않고, 대충대충 그리는 해골바가지에 정이 붙질 않았다. 머리와 가슴, 손이 따로 놀았다. 전투 때마다 졸리 로저 기는 불타고 찢겼다. 코를 푸는 휴지 같았다. 허망했다. 남을 겁주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게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도 누가 해골 그림을 그리는지 관심이 없었다. 구야는 손만 놀려댔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다. 그 기회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 p.167
팔짱을 끼고 흐뭇한 얼굴로 자기 그림을 내려다보는 렘브란트의 얼굴은 카피탄의 집무실에서 봤던 자화상과 닮았다. 구야가 카피탄의 집무실에서 그의 자화상을 봤다고 하니, 렘브란트는 돈만 아는 놈을 골려주려고 그린 그림이라며 껄껄 웃었다. 데지마에서 그림으로 봤던 사람을 여기서 직접 만나게 되다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렘브란트도 데지마까지 흘러간 자기 자화상을 본 사람을 만났다며 건배를 외치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구야는 렘브란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데지마에서 본 자화상 속의 남자는 야심만만한 젊은이였다. 팔짱을 끼고 구야를 노려봤던 그 젊은이가 저렇게 볼품없는 늙은이로 변했다니. --- p.208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 아래쪽에 ‘하멜’이란 저자 이름이 보였다. 구야는 주인에게 차 대신 책을 사겠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구야는 토탄통을 부엌에 두고 다락방에 올라갔다. 허겁지겁 촛불을 밝히고 서툰 네덜란드어 실력으로 읽어나갔다. 하멜은 괴상한 사람들이 사는 이상한 곳에서 자신들이 겪은 고초를 써 내려갔다. 마지막 장까지 읽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끝까지 읽었지만 구야는 나오지 않았다. 구야는 거기 없었다. ‘나는 어디로 간 걸까.’ 분명히 그들과 함께 조선을 떠났다. 하멜은 임금을 받기 위해 쓴 보고서에서 구야를 빼버렸다. 무슨 까닭에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