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잉글리쉬도 글로비쉬부터?!
--- 정민경(bennys@yes24.com)
모든 일을 시작할 때 원대한 목표를 두고 출발하면 좋겠지만, 경험상 언어를 배울때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너무 지난한 목표는 의욕 상실을 불러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네이티브의 발음을 듣고 있으면, 솔직히 어찌해도 못따라가는 걸 뭘 애써 배우는가? 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치밀때도 있다. 길을 지나다 한참 어린 교포 십대들이 까르르르 영어로 웃고 지나가면, '아 이 나이 되도록 뭐했지'라는 엉뚱한 자괴감까지 밀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잠깐, 다시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여기에 살 예정인 내가, 누구에게 정확한 영어 발음을 가르칠 일도 없을 내가 100% 완벽한 영어를 해야 하는가 싶다. 그저 전하고 싶은 것 전하고, 알아 들어야 할 것 알아들으면 되지 싶은 거다.
이 책의 저자 장 폴 네리에르도 비슷한 생각을 했나보다. 다국적 기업인 IBM의 유럽 본부 부사장이었던 그는 40여개국에서 온 동료들과 일하면서, 굳이 영국의 요크나 미국의 뉴욕에서 쓰이는 영어가 아니더라도, 효율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고 한다. 오히려 수많은 비영어권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할 경우에는 서로의 영어 수준을 고려한 영어가 이해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체험에 꾸준히 살을 붙이고 경험치를 쌓아 '글로비쉬(Globish)'라는 이름의 새로운 영어를 제시했다. 낯선 명칭이지만 글로비쉬는 에스페란토처럼 새로운 언어가 아니라, 쉽게 배울수 있는 간단한 영어, 영어의 다이어트판 정도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잠시 접어두고, 좀더 실질적인 목표, 의사소통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주지한다면 그의 주장은 매우 매혹적이다. 글로비쉬의 가장 특징은 우선 1500개 정도의 상대적으로 적은 단어를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쉬운 문장 구조, 그리고 몇가지 의사소통 기술과 문화적인 이해만 있다면 유연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nephew 라는 단어를 쓰는 대신 sister's son을, siblings 대신 brothers and sisters를 쓰는 식이다. 물론 1500개의 어휘는 영시를 감상하거나 드라마 CSI를 보는데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의사소통을 하고 사업적인 회합을 하는데는 무리가 없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송출하고 있는 미국의 VOA라디오 방송에서도 가능한한 많은 청취자들이 들을수 있는 방송을 만들기 위해 1500개의 단어만으로 모든 대본을 쓴다고 한다.
글로비쉬를 익힐 때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발음. 완벽한 발음이 목표가 아니라 '발음의 오차 범위'안에 드는 수준을 익히는 것이다. 모국어의 개성이 남아 있더라도 보편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발음과 억양을 연습하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우선 프랭크 시나트라나 비틀즈 등 미국이나 영국 가수가 부른 느린 리듬의 곡 24곡을 가지고 발음과 어조를 통째로 외워 받아쓰는 훈련을 권한다. 따라해보니 이 방법은 두 가지 장점이 있다. 표현이 귀와 입에 맴돈다는 것과, 시대를 넘어 살아 남은 좋은 가사들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저자는 농담 반 진담으로 글로비쉬를 바벨탑 이전의 공통 언어에 빗대었지만, 그래서 아무리 많은 단어를 알고 있더라도 소수의 단어만을 사용해서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도 하지만, 사실 글로비쉬는 처음 말했듯이 영어의 다이어트 판으로 보는게 적당할 것 같다. 특히 업무상 의사소통의 필요가 절실한 비즈니스맨에게 아주 적합한 지침서이다. 이 책에 소개된 글로비쉬의 여러가지 노하우, "의사소통하기 전에 상대방을 파악하라, 자기 나름대로의 속도로 말하라, 비유적인 표현을 피하라, 부정형의 질문을 피하라, 의사소통에 도움이 되는 공통적인 제스처를 익혀라" 등 은 비즈니스 영어 상황에서 바로 도움이 될만한 방법들이다.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사회, 문화적 격차가 벌어진다는 잉글리쉬 디바이드(English Divide) 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영어를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늘어났다.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영어공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이다. 외국에서 태어나지 못했다고, 조기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않았다고 포기하지 말자. 영어는 언어이고, 말할것도 없이 언어의 가장 큰 목적은 의사 소통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