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사진을 고르다가 나의 뒷모습을 찍어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거리에서나 전철에서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건 남의 뒷모습만 실컷 구경하지만 나의 뒷모습도 때로 궁금하다.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무방비상태의 뒷모습을 이모저모로 찍어보는 것이다.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진실한 말이 거기 있지 않을까. ---「사랑의 눈」중에서
빌딩 지어 올리는 일이 끊이지 않는 도심 거리에서 나는 오늘도 빌딩 하나를 해체한다. 불도저도 없고 포크레인도 없다. 오로지 공상을 연장 삼아 상상력 부재의 유리와 철골의 정사각형 빌딩, 간판만 즐비한 모더니즘 건물의 이기심을 뜯어낸다. 성형외과를 뜯고 치과와 피부과, 산부인과, 커피 체인점, 네일샵, 모텔, 에스테틱스, 유학원, 어학원, 스마트폰 대리점, 패스트패션 상점을 차례로 허물어버린다. 다 부수고 나니 남은 공간은 지하 알라딘 중고서점과 그 건너편 교보타워 지하 교보문고다.
드디어 강남 일대가 눈을 뒤집어 쓴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하고 모내기 끝난 논물이 별빛을 받아 찰랑거린다. ---「터」중에서
‘환승하다’
세상은 갈아타기를 권한다.
부부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는 일은 이제 식은 죽 먹기지만, 사람들은 식은 죽, 삭은 죽의 멀건 지리함에 환승을 꿈꾼다. 사회학자는 보통사람도 두세 번 결혼하는 사회를 예언했다. 은행은 예금 갈아타기를 권장하고 보험사나 전화국은 다른 회사로 바꾸기를 유혹한다.
한 가지 색의 순환선이 지루할 때 환승놀이를 한다. 오렌지, 블루, 그린, 핑크 라인의 스무 개쯤 되는 개찰구에서는 ‘환승입니다!!’로 종일 난타전을 벌인다. 하룻밤 사이 돋는 사춘기 아이 여드름처럼, 타다닥 터지는 팝콘처럼, 환승 소리 뒤덮인 역사에서 이곳이 우주정거장인가 착각하기도 한다.
하루 열두 번의 환승을 거치면 귓속에서 출퇴근하는 전철 환승후유증을 앓는다.
‘환승입니다…… 환승. 환승…. 너도 바꿔!’ ---「터치 터치 움직임 없는 움직씨들」중에서
봄 길, 봄 마을, 봄 동산, 봄 바다……, 오두막집 마당에도 바람이 지나간 듯 온통 너그러운 풍경이다.
어릴 적 기억 속 보리밭에 일던 봄바람도 꼭 그런 모습이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소들소들 비영비영했던 풍경은 쓰러졌다 일어나 출렁거리고 마을은 파랗게 살아났다.
그렇게 생색내지 않아도, 오래도록 노래하지 않아도,
바람결에 수굿수굿, 바람결에 얼굴 붉히고,
바람 지나간 그 자리는 봄의 것들이 활짝 마음을 열고 말아 나를 부끄럽게 한다.
언제 나는 사랑 풍성한 봄바람으로 풀 한 포기 밟지 않은 채 지천에서 고개 드는 봄꽃들을 춤추게 할까. ---「바람결에 수굿수굿」중에서
운현궁 정원을 들어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광경을 만났다. 참새일까. 서울에만 산다는 직박구리 텃새일까. 갈색 털의 한주먹도 안 되는 새 한 마리가 손바닥만 한 웅덩이에 부리를 박고 고인 물을 부지런히 쪼아 먹고 있다. 행여 새가 놀라서 그나마 물도 못 먹고 날아가 버릴까 나는 그대로 멈춘 채 새를 바라보았다. 갓난아기 같은 새가 마시는 물은 빗방울 한 방울이나 될까. 어서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흙 범벅인 물이라도 실컷 먹기를 바라며 힐끔거린다.
밤사이 고인 물을 찾아든 새를 보니 물 한 방울 얻기 힘든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근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물 고인 틈새가 없으니 작은 새의 부리를 어디다 들이박겠는가. 도심 빌딩에서 먹을 물은 새의 눈물만큼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거리의 나무들도 도시계획 속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어쩌다 날아오는 새를 위해 있는 힘껏 몸을 흔들어도 이파리의 물방울이나 굴려 보낼 뿐 힘이 없다.
철근과 유리와 시멘트,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도시공간은 한 마리 새에게도 무심하고 야박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보다 흔해진 커피 가게 앞에서 빨대가 꽂힌 일회용 컵이나 페트병을 쪼는 비둘기도 물을 찾는 것인지 사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는다.
---「목마른 도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