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엔찌』는 바그너가 불란서 7월 혁명에 열광해 빠리에 발을 들여놓았을 청년기에 작곡된 곡이다. 14세기 로마의 호민관인 리엔찌는 귀족의 전제 정치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을 도와 공화정을 수립한다. 하지만 리엔찌는 사면된 귀족들이 그에 대한 모반을 책동하고, 여동생 이레네와 귀족 청년 사이의 사랑이 시민들의 오해를 사게 되어 궁지에 몰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황마저 그를 파문하게 되자 시민들은 반란의 기치를 들고, 격랑 속에 리엔찌와 이레네는 화염에 휩싸여 생을 마친다. 결국 시민들도 다시 자유를 상실한다.
바그너가 질풍 노도기를 겪던 청년 시절의 작품이니 만큼 격렬한 금관과 열화와 같은 유니즌이 전곡에 넘실거린다. 전투적인 행진곡을 엮어 가는 크나퍼츠부슈와 빈 휠하모니의 혼연일체가 된 협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지크후리트』는 『니벨룽의 반지』 중 세 번째 이야기에 해당한다. 쌍둥이 남매 지그문트와 지글린데 사이에서 태어난 지크후리트는 반지의 저주를 낳은 난쟁이 알베리히의 동생인 대장장이 미메의 손에서 자란다. 미메는 지크후리트를 유인하여 거인 화후너를 죽이고, 세계를 지배할 반지를 차지하려 한다. 화후너를 물리치고 난 후 새들의 귀뜸으로 미메의 정체를 알아챈 지크후리트는 그를 죽이고, 다시 새들의 얘기를 좇아 불기둥에 에워싸여 잠자고 있는 브륀힐데를 구하러 떠난다. 이때 숲을 지나며 부르는 노래가 이 `숲의 중얼거림'이다.
이 음반에서 크나퍼츠부슈가 지크후리트로 발탁한 가수는 후란츠 레히라이트너이다. 1914년 오스트리아 티롤의 슈탄짜흐에서 태어난 이 헬덴 테너는 이상하게도 그리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상쾌하고, 지적인 가창으로 레코딩이 아니었더라면 잊혀졌을 지난 시대 위대한 바그너 해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무대신성축전극'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바그너 최후의 작품 『파르지활』은 그 종교적인 성격으로 인해 작곡가 자신이 바이로이트 밖에서는 상연하지 말라고 유언했던 문제작이다.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성창(聖愴)과 그 피를 받은 성배(聖杯)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몬살바트의 암포르타스 왕이 악의 마법사 클링조르의 계략에 휘말려 성물(聖物)을 빼앗기게 되자, 대지가 황폐해지고 만물은 생식력을 상실한다. `순수하고(parsi) 어리석은(fal) 자'만이 이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탁이 내려오고 모두가 그를 기다리는 가운데, 상서로운 백조를 무심결에 쏘아 죽이는 젊은이가 등장한다. 몬살바트와 기사도를 클링조르로부터 구해낼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파르지활은 그를 방해하는 마법에 걸린 요녀(妖女) 쿤드리를 제압하고 성창과 성배를 되찾는다.
곡은 신비롭고 긴 호흡으로 시작해 점차 규모를 확대해 간다. 시간이 공간으로 변모하는 1막의 정경이나 파르지활이 성창으로 암포르타스를 치유하고 기독교 세계를 구원하는 모습이 장엄하게 그려져 있다. 크나퍼츠부슈는 텔덱과 필립스에서 각각 바이로이트 실황을 녹음한 전곡 연주를 남겼는데, 그 중 필립스 쪽이 더 완성도가 높다. 그보다 10년 앞선 이 빈 휠하모닉니와의 전주곡 연주도 기념비적인 전곡 녹음과 같은 웅장한 사운드를 재현한다.
삼부작 『니벨룽의 반지』 중 서막인 『라인의 황금』의 뒤를 잇는 첫날의 음악 『발퀴레』는 이 시리즈의 네 곡 중 가장 유명하여 곧잘 단독으로 상연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이 `발퀴레의 말 달리기'는 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기도 한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다. 발퀴레는 주신(主神)인 보탄이 대지의 여신 에르다와 혼외 정사를 통해 낳은 여덟 명의 딸로 천마(天馬)를 타고 다니며 죽은 전사(戰士)의 시신을 옮기는 임무를 맡고 있다.
보탄이 누이와 정을 통한 자신의 인간 아들 지그문트를 도우라고 명령하는 말을 듣고 아내 후리카가 "불륜을 저지른 남매를 돕다니 그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쫓아 내려온다. 그 모습을 본 발퀴레의 여전사 중 맏이인 브륀힐데가 재빨리 천마를 타고 도망치며 부르는 씩씩한 노래가 이 부분이며, 관현악 단독으로도 곧잘 연주된다.
결국 보탄은 아내의 등등한 기세에 눌려 애초 도우려고 마음먹었던 지그문트를 죽이고 만다. 작열하는 빈 휠하모니의 현과 관의 기세는 구름 속을 치달는 군마의 형상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바그너가 본격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최초의 작품이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슈나벨 레보프스키의 회상』과 유령선 설화를 접목해 만든 작곡가 자신의 대본에 곡을 붙였다. 신의 저주를 받은 화란인 선원인 주인공은 정처 없이 바다를 떠돌 운명이나 7년에 한 번 육지에 정박했을 때 지순한 사랑을 얻으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가 7년 만에 배를 댄 곳은 노르웨이의 어느 해안이다. 그곳의 선원 달란트에게는 젠타라는 딸이 있으며, 그녀는 어려서부터 보아온 벽에 걸린 초상 속의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나이가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할 상대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대동하고 나타난 화란인을 보고 단번에 그 사람임을 깨닫고 사랑을 맹세한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에릭은 이들의 사랑을 경고하고, 이를 본 화란인은 젠타의 사랑이 거짓이라 생각하며 배를 출발한다. 이를 보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젠타. 그녀의 순수한 사랑에 화란인의 저주가 풀리고 두 연인은 하늘로 승천한다.
호른으로 묘사되는 저주 받은 화란인의 모티브와 목관이 표현하는 단아한 젠타의 모습이 강렬한 바다의 인상과 더불어 펼쳐지며, 여기서도 크나퍼츠부슈의 약동하는 해석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바그너가 비참한 파리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30세 되던 해 드레스덴 궁정극장에 지휘자 자리를 얻었을 당시 작곡한 곡이다. 전곡은 『로엔그린』과 함께 가장 자주 공연되고 서곡도 콘서트홀의 주요 레퍼토리로 굳게 자리잡았다. 바르트부르크 성의 명창대회에 참가한 음유 시인 탄호이저의 애욕과 구원을 그린 이 오페라는 서곡에 전체의 분위기와 모티브가 모두 녹아 있다. 성주의 조카이며 애인인 엘리자베트의 지순한 사랑을 잊고 베누스 여신의 질펀한 사랑에 빠진 탄호이저가 순례의 시간을 통해 다시금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다는 이야기가 이 서곡에 압축되어 있다. 관능적인 베누스 산의 향연을 가운데 두고 앞뒤에 경건한 순례의 합창을 전개하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느릿한 박자 속에 온갖 화려한 광채를 불어넣는 크나퍼츠부슈의 해석은 듣는 이의 긴장을 끝까지 늦추게 하지 않는다.
--- 정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