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수백 차례 피정을 인도했으며, 수천 번 설교를 했다. 내가 말할 때 사람들이 때로는 새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며, 때로는 새로운 영감을 받게 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회심하지 않으며, 실제로 변화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 이상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것은 실제 상황들이다.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대결이다. 즉 그들이 눈 똑바로 뜨고 대면하고 싶지 않은 것을 직시하는 것이며,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의 초점을 정직한 관점에서 바라보라. 당신의 관점을 이따금씩 바꾸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당신 자신을 돌아보라. 달리 어떻게 당신이 자유롭게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공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관점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대체로 나르시시즘에 머물고, 우리 자신의 에고와 문화라는 덫에 걸린 상태로 살게 된다.
유대-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남성적인 은유들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통해서 전달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치유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계속해서 하느님에 대해 여성적 이미지들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이 세상과 역사 속에서 아버지로 인한 상처가 너무나 깊고 속속들이 배어 있기 때문에,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하느님에 관해 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보다 위험한 말인 “아빠(Abba)”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아빠에 관한 상처가 크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토머스 머튼이 말한 것처럼, 절벽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열차의 기관사 같다고 느낀다. 그는 부지런히 통로를 오가면서 승객들에게 너무 늦기 전에 열차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단지 그의 히스테리처럼 보이는 행동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볼 따름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해방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기 전에는 아무도 해방시킬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좀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처럼, 중산층은 충분히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있으며, 제한적이지만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해방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기까지는 정말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때로는 우리가 평생 동안 해방과 구원의 문제를 완전히 외면한 채 살아간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무시되는 말씀이지만 가장 충격적이며 도전적인 말씀이 바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오 19:24; 마르코 10:25; 루가 18:25)라는 말씀이라는 것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도대체 왜 이 중요한 말씀에 관해 교황들이나 사제들이 결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교리적인 선언문들을 작성한 적이 없는가? 아마도 우리들 자신이 바로 예수님이 지적하신 부자들이며, 또한 우리가 질문을 제기해야 마땅한 체제의 열매들을 너무 많이 누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의 영혼을 교육시키는 것은 어두움과 비탄과의 투쟁이다. 그 어둠은 육체적으로 야곱의 상처받은 엉덩이뼈처럼(창세기 32:26) 심각한 고통과 장애로 체험된다. 지적으로 그 어둠과 부조리를 직면하는 것은 수수께끼들과 공안(koans)을 통해서인데, 스핑크스의 질문, 어부 왕(Fisher King), 선불교의 선사가 던지는 대답 없는 화두 같은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상당부분이 이와 똑같은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서방 교회는 그의 역설적인 지혜를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인내심이 없었다. 그의 역설적인 지혜는 세 번째 단계, 즉 깨달음의 단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한 사람의 사제로서 내가 확신하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두 번째 복잡한 의식의 단계에 있으며, 또한 상당수 보수적인 지도자들은 첫 번째 단순한 의식의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 단계를 거룩한 단계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비유들과 가르침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준비하고 깨어있는 것에 관한 가르침들인가를 주목해보라. 이런 준비와 깨어있음을 가장 쉽게 대체하는 것이 종교다. 종교는 과거와 미래에 관한 확실한 대답들로 현재의 단순한 깨어있음을 대체한다. 이상하게 보이지만, 제도종교는 흔히 참된 깨달음을 피한다. 제도종교는 사람들이 인생의 초기 단계에서 죽음(dying)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느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훈련을 잘 받지 못하고 있다. 성년식은 언제나 죽음의 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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