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벗어났을 때, 나는 가끔 「완벽한 신념 속에 몇 달」에 빠져 있는 게 아주 편안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흔한 GPS 방식에 따라, 우선 희망이라는 똑바른 길로 가다가, 그다음에는 안심이라는 길로 가는 데 가장 알맞은 이정표를 선택하는 자동 조종 장치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나는 종교도 없으며, GPS도 없고, 나의 아내는 날마다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더 내게서 멀어지고 있으며, 나는 아버지보다 더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더구나 내 아들은 어떻게든 에너지를 보호하려고 전력을 다하는데, 내 딸은 에너지만 많이 잡아먹고 쓸모는 전혀 없는 물건들로 자기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거기에다가 내 작업은 골프 연습장에서 보낸 하루만큼이나 흥미롭고 풍요로웠다. 큰아버지는 멈춰 선 메르세데스 벤츠 운전석에서 이제 막 세상을 떠나, 동생이면서도 기쁨으로 환한 얼굴을 한 바로 내 아버지의 면전에서 한 줌 연기로 사라졌다. --- p.26
오늘도 여전히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고, 내 책임을 따져보려고 애를 썼다. 나는 우리의 지난 삶을, 무의미하면서 내밀한 사소한 것들을, 어두우면서 빛나는 이미지들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바다에 갔을 때 아버지의 배에서 아이들의 목소리와 함께 안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녀가 오래전에 썼던 향수의 이름과 그 향기를 알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보낸 지난 30년에 대해서 잊은 게 하나도 없었다. 아무것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농쳤다. 말하자면 순간의 기억을 놓쳤다.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안나가 조심스럽게 멀어졌던 그때, 모든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날들의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 pp.32~33
“내가 속한 현실 속에서는 당신은 거의 있지도 않아.” 이 말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랑뎅 박사에게 안나가 말한 현실이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우리는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지만, 그 관계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로 인해서 하루를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바로 그런 관계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관계 때문에 우리 모두는 타협할 준비, 이성적으로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나는 전문가의 대답이, 내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필요했다. 그러나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려는 순간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고 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p.124
그때 나는 셀마 샨츠가 복도를 지나 옆 사무실로 들어가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보았다.
몹시 뜨거운 열기가 내 얼굴에서 타오르고 내 가슴은 모든 게 빠져나가서 텅 비고 말았다. 뇌에서 시작하여 안면과 가슴 부위를 거쳐 복부에 이르는 미주 신경이 거북해진 것을 느끼면서 나는 의자 팔걸이를 꽉 잡았다.
그녀는 안나와 닮은 정도가 아니라 바로 안나였다. 안나의 완벽한 현현이었다. 30년 전의 안나 로카 델 레이와 완전히 닮은꼴이었다. 안나 로카 델 레이, 텔레스포로의 딸이며, 생기와 신뢰로 가득 차 있던, 온전하고 행복한 안나, 잠도 많이 자지 않던 그때의 안나와 닮았다. 확신하건대, 그 아름다움으로 나를 변모시킨 안나였다. --- p.150
우리 가족이 특별한 한 해를 보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내게 시간이 좀 필요했다. 지난 한 해는 우리가 그때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으며, 마치 불이 났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짐승들처럼 우리를 앞으로 곧장 내달리며 도망가게 했던 시기였다. 나의 아버지가 가장 먼저 쓰러졌으며, 그다음에 안나가, 그리고 결국엔 내가 쓰러졌다. 우리는 각자 먼 곳으로 아니면 반대되는 곳으로 떠났으며 공포의 여러 다른 형태로 이성을 잃었다. 마치 강압적인 뭔가가 우리를 우리 삶에서 쫓아내는 것처럼. 이 기이한 전염병의 근원은 우리 몸속 어디에선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묵시적으로 결론을 내린 이성적인 화해는 잠시나마 우리에게 새로운 지진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악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문 뒤에, 다시 나타날 준비를 하고서 숨어 있었다.
--- p.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