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헌법을 제정하는 일도 힘겨워했는데, 더욱이 프랑스 전역에서 계속 민중이 들고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지방 도시와 농촌에서는 대체로 빵값이나 생활필수품 때문에 들고일어났으며, 툴루즈나 님 같은 곳에서는 종교적인 문제도 소요사태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마르세유에서도 왕당파와 혁명 지지자가 충돌했고, 교황령 아비뇽은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나 프랑스에 통일되고, 프랑스 헌법을 적용해 시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몽토방, 바 리무쟁Bas Limousin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한마디로 혁명이 진행되는 1790년은 화합보다는 극복해야 할 불화가 훨씬 더 많은 한 해였다. --- p.42
혁명기가 아니라 할지라도 당시 국제관계 속에서 모든 나라는 외교관, 군인, 민간인을 동원해 다른 나라의 정보를 캐냈다. 이번에는 숫자 편지를 보내서 정보를 알렸다. 이러한 편지를 해독하려면 쌍방이 미리 책 한 권을 정해놓아야 했다. 예를 들어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몇 쪽 몇 째 줄의 몇 번째 낱말을 숫자로 찾아내서 문장을 만들어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7월에는 국경에서 첩자를 잡았는데 그는 열쇳말을 알아야 해독할 수 있는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사람, 도시, 요새를 특정한 부호나 별명으로 지칭하고, 기병대나 보병대의 위치와 숫자를 알려주는 암호 편지였다. 왕은 십자표, 파리 시장은 세모, 리케티 레네Riquetti l'aie(미라보 백작은 귀족 칭호를 쓰지 않는 법을 제정한 뒤 이렇게 불렸다. 레네는 형이라는 뜻이며 미라보 자작과 구별하는 말이다)는 V, 모리 신부는 Y로 표기했다. 잡힌 첩자 리올(일명 트루아르)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했다. --- pp.60-61
마르세유의 왕당파는 끈질겼다. 그들은 새로운 헌법의 원칙을 적용해 탄생한 합법적인 시정부를 공공연히 부인하면서 오직 왕의 군대 지휘관만이 정통성을 지닌 지도자라고 선전했다. 리외토는 시정부를 새로 뽑기 이틀 전에 공공연히 도전했다. 그는 군대를 모아 선거 당일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불법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거기서 시정부에 반대하는 선동을 일삼았다. 마르세유의 모든 구는 화가 나서 이 범죄 집단을 고발하는 한편 예정대로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뽑았다. 마르세유 코뮌 의장으로 뽑힌 카브롤 드 몽 쿠송도 시민정신과 애국심이 투철하고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이러한 합법적인 과정을 보면서 이를 가는 사람들은 오직 귀족주의자와 왕당파뿐이었다. 이 사건은 애국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마르세유뿐만 아니라 남부 여러 도시에서 혁명과 반혁명의 세력은 끊임없이 충돌했다. --- p.84
병사들이 돈 문제 때문에 몹시 화가 났다는 것이 군사반란의 동기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낭시의 경우도 장교들의 공금횡령 같은 돈 문제가 끼어 있었다. 드누 장군은 병사들이 자신들의 지휘관을 임명하고 꽃수레에 태운 뒤 장교들을 길잡이와 호위로 세워 수레를 몰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또한 그래서 일부 장교들은 부대를 떠나려 하고 일부는 숨어버렸다고 했다. --- p.173
소수인 진압군이 다수의 저항세력을 차근차근 물리친 것은 국회가 제정한 법을 집행한다는 정당한 명분문제와 함께 의사소통의 한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란군 대표들은 부이예 장군과 면담할 때 여러 가지 제복을 보고 병력을 처음에는 3만 명까지 추산했다가 나중에는 1만 5,000명으로 추산했다. 반란군은 실제로 소수인 진압군에게 정신적으로 졌다. 러시아 혁명에서 소수파가 다수파처럼 알려져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예와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시내는 아비규환이었다. 어떤 기병 장교는 부상을 입은 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데, 그를 학대하던 사람은 오히려 그의 머리에 권총을 발사해 죽여버렸다. 어떤 신부가 죽어가는 사람을 업고 가는데 미친 듯한 병사가 그 앞을 가로막더니 소총 개머리판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숨을 끊어놓았다. 창문에서 총을 쏴서 기병을 땅에 떨어뜨린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기병의 몸을 뒤져 물건을 가져가기도 했다. 이것은 대체로 반란군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