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정도로 창생의 성명(性命)을 바르게 하는 사람은, 결코 성명 원래의 면목을 버리지 않는다. 때문에 비록 발가락이 붙어 네 발가락이 되었다 할지라도 붙었다 할 수 없고, 육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쓸데없는 것이라 할 수 없고, 그것이 길다고 해서 지나친 것은 아니고, 그것이 짧다고 해서 부족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물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 하지만, 그것을 길게 늘여 준다면, 오히려 걱정을 끼치는 결과가 되겠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 하지만, 그것을 짧게 잘라 준다면 오히려 슬픔을 주는 결과가 되겠다. 그러므로 본래 길게 타고난 것은 잘라 줄 필요가 없으며, 본래 짧게 태어난 것을 길게 해줄 필요가 없으니, 그렇게 한다면 스스로 걱정을 불러들이는 일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인의를 말하는 이는 설마 인정이 아닐까? 인의를 자처하는 사람은 하필이면 많은 걱정에 찌푸리고 있을까? 만일 네 발가락 병신에게 칼을 대어 벌려 준다면, 그는 아프다고 울 것이고, 이로 육손이의 그 손가락 하나를 입으로 물어 끊는다면 역시 아프다고 소리 지를 것이다. 두 사람이 각각 하나는 그 숫자가 지나치고, 하나는 그 숫자가 부족하지만, 슬퍼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요즘 세상에 이른바 인의군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세상을 개탄하는가 하면, 반대로 불인(不仁)한 사람은 타고난 인을 잘라 버리고 부귀만을 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의(仁義)는 인정의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인은 결코 강요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