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있고 나라가 있는 법입니다. 백성이 없는 나라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정도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말없이 성균관을 바라봤다. 마치 성균관 하나 다시 세웠다고 나라가 잘될 리는 없을 것이라는 마음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본 이색은 아주 예전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불길함이 떠올랐다. ---「1장 ‘이색과 정도전’ 」중에서
윤증은 스승이 평생 주자를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라고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주자의 뜻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고 있다고 따졌다. 윤증의 눈에는 말로는 주자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정적을 가혹하게 제거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스승이 괴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송시열에게는 사문난적을 없애는 일이야말로 평생의 과업이었다. ---「2장 ‘송시열과 윤증’ 」중에서
스승은 특정 제자에게 자신의 못다 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를 건다. 박규수는 김옥균에게 할아버지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개화를 성사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닫는 천재 김옥균은 개화라는 가르침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혁명이라는 꿈을 꾸었다. ---「3장 ‘박규수와 김옥균’ 」중에서
“나에게 무얼 배우겠다는 말이냐?” 우륵의 물음에 세 젊은이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계고가 대답했다. “저는 악기를 좀 다룰 줄 알고, 법지는 목소리가 좋습니다. 만덕은 춤사위가 뛰어나고요.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는 선생님의 마음을 배우고 싶습니다.” “마음이라…” “그렇습니다. 신라로 넘어왔지만 가야금을 놓지 않고 계시는 그 마음 말입니다.” 당돌하기도 하고 대담하기도 한 계고의 얘기에 우륵은 미소를 지었다. ---「4장 ‘우륵과 계고’ 」중에서
송익필은 종이에 ‘예禮’자를 써서 보여주었다. “이 글씨의 근원은 아느냐? 보일 시示에 풍년 풍豊자가 합쳐지고 변한 것이다. ‘시’자는 신神을 뜻하고 풍자는 제물을 제사상인 두豆 위에 올려놓은 모양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떠받드는 마음으로 윗사람을 섬기고 도리를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이고, 예학이며, 또한 성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장생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뜻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스승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5장 ‘송익필과 김장생’ 」중에서
허련은 스승이 유배 간 제주도를 세 번이나 왕래했다. 비행기도, 여객선도 없던 시기에 위험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정희는 멀리서 찾아와 준 제자 허련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의 처지를 잊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서 가르쳤고 허련은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허련의 그림은 이 시기를 거쳐서 차츰 완성되어갔다. ---「6장 ‘김정희와 허련’ 」중에서
김창숙 역시 이런 한주학파와 스승인 이승희의 영향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세상에 눈을 떴다. 지켜야 할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을 빨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대부분의 선비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7장 ‘이승희와 김창숙’ 」중에서
무오사화는 경상도 관찰사이자 훈구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극균의 천거로 조정에 출사했던 김굉필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헌부 감찰을 거쳐 형조좌랑까지 비교적 순조롭게 승진하지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김굉필은 자신의 운명을 바꿔줄 제자를 만난다. 바로 조광조였다. ---「8장 ‘김굉필과 조광조’ 」중에서
스승과 제자는 어느 단계를 넘으면 여러 형태의 공동운명체로 묶이게 된다. 스승 백이정과 제자 이제현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를 넘어서서 하나의 정치적 동맹관계로 결속하기에 이르렀다. ---「9장 ‘백이정과 이제현’ 」중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것을 배우느냐는 지엽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 가르침이라는 것은 단순히 학문을 전수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쉽게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이 문제로 수많은 스승과 제자들이 부딪쳤지만 이달과 허균은 그들만의 답을 찾았다. 세상의 눈높이에 맞출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