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사기』 전문가로 30년 가까이 『사기』 공부에 매진하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대 한중 관계사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중국 소진학회 초빙이사이며, 사마천의 고향 산시성 한청시에 설립된 사마천학회의 최초이자 유일한 외국인 회원이다. 영산 원불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20년 동안 130여 차례 중국을 다니며 중국사의 현장과 연구를 접목해 남다른 영역을 개척해 왔다. EBS에서 ‘김영수의 사기와 21세기’라는 주제로 32회에 걸쳐 『사기』를 해설하여 국내 시청자들의 큰 반향을 얻었고 유수한 대기업임원과 CEO, 공공기관의 리더들을 대상으로 『사기』에 담긴 리더십과 경영의 지혜를 수백 회 강의했다. 현재 한글세대를 위한 『사기』 완역 작업을 진행 중이며, 짓고 옮긴 책으로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난세에 답하다』,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나를 세우는 옛 문장들』, 『1일 1구』, 『사마천과의 대화』, 『사기를 읽다』, 『36계』 등이 있다. 2015년 한?중 관계의 질적 심화를 위해 ‘한국사마천학회’를 설립했다.
관중은 약 40년 동안 환공을 보좌하다가 환공과 포숙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뒤이어 포숙이 세상을 떠났다. 늙은 환공은 자신의 약점인 술과 여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소인배들까지 가까이 하다가 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결국 별궁으로 쫓겨났다. 별궁은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되었고 음식도 주어지지 않았다. 가련한 환공은 배고픔에 몸부림치다가 굶어 죽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일대 영웅의 죽음을 모두 나 몰라라 하여 시신이 썩어 구더기가 별궁 담장을 넘어오고서야 비로소 환공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의 시신은 죽은 뒤 60여 일 만에 수습되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39쪽, 환공_ 구더기가 파먹은 최초의 패주
진시황은 유서를 즉시 보내지 않고 조고에게 맡기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혹시나 자신이 병석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 때문에 편지를 바로 보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평소 죽음이란 단어조차 꺼내지 못하게 할 만큼 삶에 집착했던 그였기에 이런 추정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진시황이 미리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전제 제왕 구조를 창안한 사람이 바로 진시황이었다. 그리고 그 통치자에게 변고가 생겼을 경우 상황이 어떨 것이라는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없는 통일 제국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가정한 후계자 논의 자체를 꺼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81쪽, 진시황_ 죽음을 두려워한 중국 최초의 황제
한신의 운명은 천하통일을 기점으로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괴통이 한신에게 ‘천하삼분’을 권유했을 때 그는 한신의 존재 가치는 항우가 건재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항우가 제거되는 날 한신도 같은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냉정하게 예측한 것이다. 한신은 괴통의 말에 깊이 고민했지만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토사구팽’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 자신은 물론 삼족이 멸족당하는 비극으로 끝난 것이다. -122쪽, 한신_ 천하 통일을 도운 충신의 애석한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