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중반 청계천 주변의 풍경을 그려낸 박태원의 소설 ??천변 풍경??이 시작되는 첫 구절이다. 제목에 걸맞게 소설에는 빨래터, 한약국, 신전집, 하숙옥, 선술집, 객줏집, 포목전, 요릿집, 기생집, 권번, 은방, 반찬가게, 고물상, 이발소, 미용원, 세탁소, 자전거포, 백화점, 카페, 당구장, 극장, 여관, 양복점, 양화점, 양약국, 병원, 신문사, 담뱃가게, 전매국, 목욕탕, 유치원, 공장, 전차, 경성역, 예배당, 우편소, 경찰서 등 다종다양한 공간들이 나온다. 왜 여러 공간이 나오는가? 그건 전통적 공간이 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강점한 땅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며 상호작용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새로운 공간들이 분화된다. 물론 기존 공간도 살아남아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새로운 공간들이 분화되어 나오게 되면 기존 공간의 성격도 바뀌기 시작한다.
이 공간들은 단지 물리적 풍경인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청계천 주변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며 살아가는 인물들이 어림잡아 70여 명 등장한다. 먼저 이미 터 잡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서로 사는 내력에 대해 샅샅이 알고 있는 이웃이다. 한약국 집 안잠자기 귀돌 어멈, 민주사집 행랑에 얹혀사는 얽음뱅이 칠성 어멈, ‘감때 사나웁게 생긴’ 수다쟁이 점룡이 어머니, 남편 사별 후 홀로 이쁜이를 키워온 이쁜이 어머니, 기생집에 드난을 살고 있는 필원이네와 같은 빨래꾼은 물론 재력가로 밤마다 마작을 일삼는 사법서사 민주사와 관철동 작은 마누라 안성댁, 경성부회의원 매부를 둔 중절모의 신수 좋은 포목점 주인, 다리 밑 거지대장과 깍쟁이들, 한약국 집 주인 영감 내외와 동경 어느 사립대학 영문과를 나온 한약국 집 큰아들, 입만 열면 기생 얘기, 여급 얘기, 갈보 얘기를 한바탕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는 은방 주인, 행여 청계천이 덮여 돈벌이를 잃지 않을까 걱정하는 샘터 주인 김 첨지, 나막신을 팔다 새로 나온 싸구려 고무신에 밀려 낙향하는 서울 태생 신전집 주인, 신전집 행랑에 있다가 독립해 돈푼깨나 번 미장이 신 첨지 등이 그러하다.
새로 이주해와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게 주짜만 빼려 드는’ 젊은 이발사 김 서방과 유리창 너머 바깥구경에 권태를 느낄 틈이 없는 김 서방 조수 소년 재봉이,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장사를 겨울에는 군밤 장사를 하는 점룡이, 서방 잘못 만난 탓에 시골에서 올라와 약국 행랑에 드난살이하는 만돌 어멈, 시골 가평에서 아버지 손에 이끌려 한성으로 올라와 한약국 사환이 된 창수, 15살 남편을 ‘호열자’로 잃고 금전꾼을 따라 천변으로 흘러든 금순이, 일본으로 밀항하려다 실패하고 서울로 온 금순이 친정아버지 용 서방과 아들 순동이, 부모형제는 물론 일가친척도 없고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협기 넘치는 카페 여급 기미꼬, 지방 순회 전문 극단을 따라다니다가 카페 여급이 된 메리, 광교 모퉁이 은방 2층을 세내어 ‘동아 구락부’라는 당구장을 새로 시작한 ‘사이상’, 빚에 쫓겨 알몸 하나 가지고 서울로 올라온 근화식당 주인, 남대문 밖 어느 석유회사 주인 등. 하지만 이들은 완전한 이방인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천변 어느 공간엔가 자리를 잡아 자신이 살아온 삶의 내력을 드러낸다. 낯선 이도 곧 친숙한 존재로 바꾸는 독특한 공간이 바로 천변이다. 물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카페에 객으로 온 ‘신사’, 샘터에 처음 빨래하러 나온 시골뜨기 ‘낯선 여편네’, 한약방에 온 애꾸눈 시골 손님, 금광 ‘뿌로카’, 금전꾼, 모군꾼, 등장수, 인력거꾼, 경찰, 신문 배달부, 음식점 배달부, 요릿집 보이, 당구장 ‘게임도리’, 카페 보이, 바텐더, 버스 걸, ‘내력을 알 수 없는 남자들.’ 이들도 ‘남들의 뒷공론’에 곧 정체가 밝혀질 터이지만, 근대 도시의 특성인 ‘익명성’이 어느 정도 그 모습을 갖춰가는 형국이다.
_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