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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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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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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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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6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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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크레마, 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폰, 안드로이드패드, 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 PC(Mac)
파일/용량 PDF(DRM) | 5.97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721쪽?
ISBN13 978896817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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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이상오
연세대학교 졸업, 독일 튀빙겐 대학교 졸업(사회과학박사: 교육학 전공),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 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창의인성연구센터장, 논문: ?교육인식론의 성립조건에 관한 탐구? 외 60여 편, 저서: [상상력과 교육 -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만남] 외 5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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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1. “아빠가 이랬다저랬다 한다.” 아이의 투정이다. 이럴 경우 “이랬다”가 지식인가? “저랬다”가 지식인가? 아니면 둘 다 지식인가, 둘 다 지식이 아닌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먼저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개발’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한다. 보존이 먼저냐 개발이 먼저냐? 어떤 사람은 ‘경제성장’이 먼저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복지’가 먼저라고 한다. 같은 사실을 놓고도 서로의 지식이 다르다. 때문에 충돌이 발생한다.
학생들에게 자유토론을 시켜 보면 의견들이 제각각이다. 같은 사건을 보고도 서로 보는 각도가 어쩌면 저렇게 다를까? 토론에 참가한 본인들도 신기하다고 한다. 정치권으로 가면 더욱 가관이다. 똑같은 사안이라도 여당과 야당의 주장이 다르고, 진보와 보수의 해석이 다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일을 해도 어떤 아이에게는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고, 어떤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다. 느낌으로 가면 더욱 심하다. 물이 반 컵(1/2) 남았다.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한다. 똑같은 대상을 보고도 서로 말하는 것이 다르다. 같은 온도의 물이라도 따뜻한 물을 만지던 손으로 만지면 차갑지만, 차가운 물을 만지던 손을 담그면 따뜻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지식은 그냥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아직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가? 또 아니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그럼 어떤 것이 정말 지식인가? 심지어 도대체 지식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정확한 지식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혹시 아무도 진정한 지식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것인가? 어디까지 알아야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우리가 안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는 무엇을 진정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지식episteme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우리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인식론자認識論者, epistemologist들의 고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제까지는 커피가 몸에 해롭다고 해서 단 한잔도 마시지 않았다. 오늘 신문에 보니까 커피가 혈액순환에 좋다고 하여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무엇이 진정한 앎인가? 커피는 몸에 이로운가, 아니면 해로운가? 과학적으로 밝혀지는 지식조차도 어느 것이 맞는지 분별하기 어렵다. 어제의 지식이 오늘의 지식과 다르다. 어른들에게 공손한 아이들이 공부도 잘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그 반대도 있으며 그와는 무관하다는 결과도 있다. 여론 조사는 늘 달라진다.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고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조사의 ‘조건과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조사기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무작위표집이라고 하지만, 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표집의 성향이 다를 수 있으므로 같은 조사라도 결과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보수 성향의 표집집단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집단조사와 진보 성향의 표집집단을 많이 가지고 있는 조사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완전히 공정해야 할 재판정에서도 판결이 달라진다. 같은 사건에도 판례判例가 서로 다른 것이다. 물론 판사의 성향도 이에 한몫을 한다. 유권해석有權解釋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도 나온다. 오늘날 지구촌 거의 모든 나라는 법치국가이다. 삶에서 법이 만사인 셈이다. 엊그제 헌법재판소에서 간통죄가 위헌으로 판결 났다. 27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간통죄가 폐지되었다는 보도이다. 법치국가에서 법이 널을 뛰고 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게 맞는가?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개그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진정한 지식으로 믿어야 하는 것일까?

2. 인간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생각은 자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homo sociologicus, homo politicus’이다.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과 ‘사회적으로 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일 것이라는 추론이다. 즉 사회적으로 지식을 공유한다는 것과 개인지식과는 서로 다를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나 사회여론이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커다란 혼란이 발생한다. 심지어 갈등도 따를 수 있다. 물론 나의 지식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식을 추인하는 것은 다른 사람 내지 사회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즉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어떠한 나의 지식도 의미와 가치를 얻기는 어렵다. 물론 ‘나는 나야’라고 버틸 수도 있고, 나중에 진실이 밝혀질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사회적 공감대가 없는 지식은 불안하다. 이를 우리는 ‘사회적 선택social selection’이라고 한다. 자연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자연도태’에서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사회도 별다르지 않다. 이렇게 되면 지식의 개념은 더욱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사회적 합의나 사회적 선택을 받지 못하는 개인, 또는 이와는 무관하게 살고 싶은 개인들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사회(또는 사회적 선택)가 기준이 되어야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렇게 이상적理想的, ideal이란 말인가? 소위 말도 안 되는 것도 사회가 받아들이면 지식이고, 사회가 수용하지 않으면 지식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이러한 논리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까지 비약된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실재론實在論, realism과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또는 名目論 간의 반립反立, antithesis이 그것이다. 과연 ‘사회社會, society’라는 것이 실재real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명목名目 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정假定, hypothesis, 즉 단지 이름name일 뿐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Max Weber(1840~1920)는 사회에 대한 이론을 ‘사회실재론社會實在論’과 ‘사회명목론社會名目論’으로 정리한 바 있다. 즉 사회는 존재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만약 우리에게 사회(공동체)가 실재한다면, 개인적 지식은 사회적 선택으로 인하여 진정한 지식이 된다. 그러나 사회가 실재하지 않고 이름名目으로만 존재한다면, 개인적 지식은 모두 지식으로 인정된다. 즉 개인마다 지식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모두 지식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는 모든 지식은 상대적相對的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소피스트들의 지식이다. 오늘날 다양성, 다양한 관점, 다양한 생각 등을 모두 용인하는 포스트모던post-modern의 지식 역시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별다르지 않다. 물론 현재는 그것이 지식으로 인정되지 않더라도, 앞으로 언젠가는 역사가 입증할 것이라고 자위하는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3. 대표적인 현대존재론자인 가다머Hans-Georg Gadamer(1900~2002)는 ‘상황contingency, situation’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여름에 해수욕장에서 비키니를 입고 있으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종로 사거리에 비키니를 입고 나타나면 바로 경찰에 끌려간다. 목욕탕에서 옷을 벗으면 별일 아니지만, 시청 광장에서 옷을 벗으면 정신병자로 취급된다. 몸을 씻기 위해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 ‘지식’이다. 그러나 같은 지식이라도 어떤 때는 괜찮고 어떤 때에는 문제가 된다. 나체의 미녀들이 길거리를 활보한다면 풍기문란이지만, 이들이 모피毛皮반대데모 중이었다면 해석이 달라진다. 결국 ‘상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같은 지식이라도 A라는 상황에서는 맞고, B라는 상황에서는 틀리다. 암癌 선고를 받았지만, 같은 약을 먹고 A라는 사람을 살아나고 B라는 사람은 죽는다. 투약된 약에 작용하는 몸의 상태(저항력, 면역력, 수용력, 적응력 등)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즉 서로의 상황이 다른 것이다. 여기서 몸의 상태가 바로 ‘상황’이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사람을 살아나고 어떤 사람은 죽는다. 약pharmacy은 대표적인 과학의 결과로서 분명 믿을만한 (과학적) ‘지식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이냐 아니냐의 모든 결정은 ‘상황’에 달려 있다.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지나친 애정행각이 예전 한국에서는 풍기 문란 죄로 구속되기도 했지만, 미국에서는 물론 윤리 차원에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별 특별한 일도 아니다.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 단속의 전례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번에는 시대적?지역적 상황이 지식을 결정한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일상에서 발생하는 지식의 혼란성이 반드시 체계적?논리적으로 이해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4. 21세기 우리는 ‘지식(기반)사회knowledge-based society, 知識社會’에 살고 있다. “지식이 적으면 무식하다”고 손가락질받던 시절이 있었다. 소위 “가방끈이 짧다”는 속어로 표현된다. 오늘날 지식은 부富나 권력勸力과 직결될 정도로 삶에 소중한 방편이 되고 있다. 시장에서도 자본과 노동이 정보와 ‘지식’으로 대체되고 있다. 특히 디지털정보통신혁명은 21세기 지식사회를 급격하게 가속화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신자본주의를 변호하는 편중 논리일 수 있다. 아니면 “지식권력”(Michael Foucault)의 논리일 수도 있다. 지식이 권력이 되고 지식인에게 더 많은 권력이 부여된다. 그러나 사실 우리 인간의 삶에는 ‘여기서 의미하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들도 부지기수다. 이를테면, 삶의 도리道理를 위시하여, 인간생활의 오랜 전통인 양심, 예의범절, 도덕, 윤리, 규범, 배려, 경건, 협동 등이 있을 것이며, 사랑, 용기, 정情, 신뢰, 의지 등도 중요한 삶의 덕목德目, virtue들일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러한 모든 삶의 덕목도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즉 ‘아무것도 모르면서’ 도리와 예의범절을 지킬 수 없으며, 아무것도 모르면서 용기를 낼 수 없고 신뢰할 수도 없다. 도덕, 윤리, 규범을 지키고 싶어도 이에 대해 일말의 지식도 없다면[無知],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다. 성인군자가 되려고 해도 무엇인가를 알아야만[知] 하지 않겠는가? 알아야 면장面長도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한, 매 순간이 지식이다. 결국 ‘지식’이란 삶에서 한순간도 유리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지식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지식사회에서 말하는 지식의 개념이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우리말에 “알아서 남 주나”라는 말이 있다. 서양에는 “아는 것이 힘Knowledge is power”라는 말도 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즉 알아야만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아야만 피할 수 있고,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앎이 곧 삶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상지식의 논리는 ‘21세기 지식기반사회knowledge-based-society’에서 말하는 지식과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일까? 우리의 일상이 ‘아는 것[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면, 이는 ‘지식이 부와 권력이 되는’ 오늘의 지식논리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두 경우는 서로 전혀 별개의 것인가? 한마디로 일상의 지식과 소위 돈富이 되고 권력이 되는 지식은 전혀 다른 것인가? 이쯤 되면 지식의 문제는 정말 혼란스럽다.

5. 계몽주의 이후 급진전된 과학의 발달, 특히 자연과학의 발달은 지식의 비약적인 발달을 초래했다. 과학 만능의 시대에 지식 만능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다. 소위 ‘과학적 지식scientific knowledge’의 탄생은 과학과 지식을 합일시켰다. 따라서 과학의 시대는 지식의 시대와 동일시되었다. 원칙적으로 과학적 지식은 ‘과학적 사실scientific fact’의 규명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오늘날 과학적 지식은 지식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지식의 ‘객관성’, ‘타당성’, ‘보편성(일반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이지 못하고 타당하지 못하고 일반화도 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한 지식은 ‘앎’도 아니며 ‘삶’과도 무관한가? 만약 ‘살아있는 한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논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앞으로는 과학자 또는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아야 한다. 정말인가? 비과학적이고 아직 입증되지 않은 지식은 지식도 아니고 이러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삶도 아니며, 과학과 무관하게 사는 삶은 정말 삶도 아니라는 말인가?
사실 ‘과학적 지식’은 우리에게 많은 것(문명의 이기와 편리함)을 알게 했으며, 이로 인한 이득도 엄청나게 많이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모두 과학적인 것만은 아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삶도 있지만, 아직 여전히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삶도 여전하다. 오히려 아직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삶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삶 중에서 훨씬 더 훌륭한 삶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반대로 과학적 지식의 폐해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인 것이 환경생태계파괴의 문제이다.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열심히 자연을 개척하고 개간했지만, 결국은 환경파괴의 위기가 찾아 왔다. 자연을 잘 관찰하면서 자연현상의 이치를 잘 분석하다가 마침내 자연현상을 잘 활용하여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내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우리의 삶은 윤택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생태환경시스템eco-system이 모두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과학적 지식은 우리 인간에게 항상 유효하기만 한 것인가?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지식은 결국 삶의 집eco인 생태환경을 파괴하는 지식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소위 ‘지속 가능한 성장sustainable development’을 위한 생태환경보호에 대한 지식은 없는 것일까? 이제 우리의 질문은, 과학의 세기, 지식의 세기에 과연 삶을 위한 진정한 지식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본다면, 여전히 ‘지식’이라는 단어는 점점 더 의문투성이가 될 뿐이다.

6. (인간의) 지식은 본질적으로 혼란성과 불확실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따라서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연과학의 세계에서조차 ‘확률이론probability theory’이 나온 지 오래다. 이제 오늘날의 과학은 ‘확실確實’이 아니라 ‘확률確率’로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확률이론確率理論이란 가능성확률, probability에 대해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로서 오늘날 통계학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즉 확률이론은 결정된 현상이 아니라 비非결정론적 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함으로써 확률적 과정 및 사건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렇게 본다면, 가장 정교하고 객관적일 것이라고 여겨지는 수학에서의 지식조차도 모두 확률지식으로 판가름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매 순간 변화하는 환경과 주변 여건을 판단하면서 결정을 내린다.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은 ‘선택과 판단 그리고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확률에 근거하여 예측?판단?결정한다. 물론 세상살이가 복잡해진 탓도 있다. 비가 내릴 확률, 로또에 맞은 확률, 부자가 될 확률, 치료될 확률, 취업될 확률 등 우리의 삶에서 확률적 사고는 일상이 되었다. 현대과학은 이미 이러한 현상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특히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이 복잡계複雜界, complexity system 이론 등으로 확장되면서, 확률론적 방법론의 위상은 전보다 훨씬 커졌다. 특히 통계역학의 등장으로 미시계의 물리적 현상들은 모두 확률로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 (학문적?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통계역학의 기초(고전적 통계역학)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볼츠만Ludwig Eduard Boltzmann(1844~1906)에 의해 수립되었는데, 이는 엔트로피무질서도, Entropy의 개념과 함께 설명된다. 통계역학의 방법은 대상의 자유도(혹은 변수의 개수)가 무척 커서 정확한 해를 구할 수 없을 때 유용하게 쓰인다. 통계역학의 파생 분야로는 비선형 동역학, 카오스 이론, 플라스마 물리학, 열역학, 유체역학 등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이며,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인가? 물론 지식(습득)의 경로는 생리학적?신경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식공유知識共有 또는 공유지식共有知識, shared knowledge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지식(습득)의 문제는 더욱더 복잡해진다.

7.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지식 개념에 대한 지적 대혼란’으로부터 시작한다. 지식은 과연 돈을 만들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인가? 물론 신자본주의가 무르익은 오늘날 지식의 ‘환금성換金性’과 ‘권력화’는 거의 일반화되고 있다. 이로 인한 ‘지식의 양극화’ 현상도 걷잡을 수 없이 격심해지고 있다. 심지어 지식의 양극화로 인하여 발생하게 되는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의 빈부 격차 내지 ‘사회적 양극화’의 문제를 감안한다면, 사회적 폐해는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한마디로 속수무책이다. 불과 20~30년 전에는 1%의 부자가 세계의 부 50% 이하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은 1%의 부자가 소유한 재산이 세계 전체의 부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지식과 부의 상관관계가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식의 편중’ 역시 ‘부의 편중’ 현상에 일익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지식이 부가되고 권력이 되는 지식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서 지식(앎)이 삶의 근본이라는 논리 역시 결코 삭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살아가는데 지식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식이 돈이 되고 지식이 권력이 되는 오늘날은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요청되는 지식은 그것이 반드시 과학지식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대로 과학이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면 과학지식으로 풀지 못하는 삶이 더 많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비과학적일지라도, 도덕과 윤리 그리고 양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지식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삶에 더 중요할 수 있다. 또한, 과학적 지식만이 양심의 지식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을 빌미로 이루어지는 지식 중에 비非양심, 비非윤리, 비非도덕성의 지식으로 결판나는 것도 다분하다. 이미 역사적으로 지식 유용성의 획을 그어준 다이너마이트 사건, 즉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Alfred Bernhard Nobel(1833~1896)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도 있다. 많이 배워서 지식을 많이 가진 자들 소위 지식인들에 의해 부정부패가 주도되는 사회라면, 차라리 많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다. 또한, 과학 만능의 시대에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과학지식이 인간에게 전체를 포괄하는 삶의 지식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경영知識經營/ P. Drucker, 노나카’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말 속에는 경영현장에서도 지식을 잘 경영하면 성공한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반대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경영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파국破局이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은 셈이다. 결국, 지식경영에서도 지식의 ‘진실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에서 요구하는 ‘진정한 지식’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이러한 지식을 어떻게 취득될 수 있을까?

8. 본 연구는 오늘날 전반적으로 우리의 지식 세계에 통용되고 있는 또는 지금까지 학문적으로 파악되고 발굴된 ‘지식 개념’에 대한 학문적?객관적 리뷰(검토)인 동시에, 지식 개념에 대한 새로운 규명과 이해를 목표한다. 구체적으로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원천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어떤 종류가 있는가? 인공지능, 인지과학, 뇌과학의 성과를 모두 모아 보아도, 이러한 의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지식과 그것을 둘러싼 현상의 체계적인 이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식’이 단순한 키워드나 일시적인 유행어로 끝나는 것을 막으려면, 다양하게 존재하는 지식의 실천 양상을 분석하고 그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스기야마 고조 외 19인/ 조영렬 옮김, 2005: 79)

아울러 ‘지식의 논리’와 ‘삶의 논리’와의 상관관계를 밝혀냄으로써, ‘우리 인간의 삶에 진실로 유용하고 의미 있는 진정한 지식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러한 지식(의 획득)이 가능한가?’에 대한 논리적 해명을 해 나가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오늘날 통용되고 이해되는 ‘지식의 개념’에는 문제점과 한계 내지 모순이 함께하고 있다는 ‘대전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첫째, 언젠가부터 우리의 지식 세계에서는 지식창출과 지식습득을 위해서 ‘방법론적 다수주의methodological pluralism’를 거부하고, 방법론적 단일주의methodological singularity에 깊이 의존하게 되었다. 실증주의實證主義, positivism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승된 지식들은 주로 실증주의적 경험과학 및 자연과학의 지식창출방식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방법론적 단일주의에 의해 창출되고 발굴되는 지식은 삶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수많은 한계와 모순을 노정시킨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방법적 단일성에 의해 해명되고 규명될 정도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단일주의 방식으로 창출되고 발굴되고 획득되는 지식으로는 온전한 삶의 이해나 삶의 유용성 같은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 어렵다. 심지어 이러한 지식 개념 하에서 파악되는 삶은 왜곡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방법론적 단일성에 경도된 지식창출, 지식획득, 지식 발굴 등의 문제는 반드시 지양止揚, Aufhebung되거나 수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21세기는 지식사회로서 지식이 부가 되고 권력이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식기반사회에서 지식의 양극화는 빈부 격차라는 사회적 양극화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지식의 부가가치가 이렇게 커지는 시대에 만약 우리가 획득하는 지식이 건강하고 정당하다면, 이는 인류발전에 큰 득得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고 잘못된 지식이나 왜곡된 지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면, 인류의 삶은 바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본 연구는 특히 후자를 심히 우려하는 차원에서 기획?실행되었다.
둘째, 본 연구는 오늘날의 지식 개념의 이해가 ‘존재론적 접근ontological approach’이 삭제된 채 ‘인식론적 접근epistemological approach’에 지나치게 경도된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존재론Ontology과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은 동전의 양면이다. 즉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우리는 모든 지식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실체)이 과연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인식이 바로 ‘지식’을 구성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존재론은 인식론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창출, 발굴, 획득이 인식론적 차원에 지나치게 경도傾倒되어 있다는 우려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 ‘인식주체’, 즉 ‘인식하는 나 또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자의적 해석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럴 경우 지식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는 심각한 ‘오해misunderstanding’가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은 본래부터 ‘인식론적 한계’를 가지고 태어나는 유한자有限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주체인 인간은 늘 ‘인식론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결국, 제대로 된 인식을 위해서는 ‘인식론적 반성과 성찰epistmological reflection’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오류 내지 오해는 존재 자체가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또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존재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 있어서 ‘인식론적 한계’ 앞에서 어쩔 수 없다고 넋두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식론적 접근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오해, 오류, 한계는 어떻게든지 ‘존재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수정 보완 교정될 필요가 있다. 특히 지식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은 ‘지식의 체계화’ 내지 ‘지식의 구조화’와도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정리되지 않은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욕구를 갖고 있다. 어느 경우에는 직장에서 얻은 지식이고, 또 어느 경우에는 개인적인 취미에서 얻은 지식이다. 자기가 흥미 있는 분야를 어떻게 표현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할까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이와 같이 지식의 체계화를 (지식의) 온톨로지Ontology, 存在論라고 한다.”(스기야마 고조 외 19인/ 조영렬 옮김, 2005: 155)

따라서 본 연구는 지식의 탄생과정과 발전 및 성숙과정에 대한 인식론적 관점과 존재론적 관점 간의 ‘조화調和, harmony’를 도모하고, 더 나아가서는 ‘관점perspectives의 새로운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2. 연구의 내용과 범위

인간학anthropology의 결론에 의하면, 애초에 동물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발버둥은 급기야 문화文化, culture를 탄생시켰다. 바로 이러한 문화 창조의 과정에서 지식知識, knowledge이 함께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인간은 우선 무엇인가를 알아야만[知] 했다. 산티아고 이론의 창시자이며 현대생태학자인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바렐라Francisco Varela는 “산다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고 하면서 생명 그 자체의 과정을 ‘인지 과정’으로 보고 있다(Maturana and Varela, 1987: 174).
실제로 우리 인간은 알지 못하고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호랑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으며 이빨이 엄청나게 크며 송곳처럼 뾰족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면[無知], 언젠가 우리는 호랑이에게 먹히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을 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무사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뱀을 밟고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죽음이다. 야산에 먹음직스럽게 자란 버섯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먹고 죽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경서인 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을 알지 못하면 백번 싸워 백번 패하고, 알고 있으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지식의 유무有無가 생生과 사死를 결정짓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식은 인간이 자신들의 본원적 생존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단이었다.

“인류는 지구 상에 출현한 이래 그들 주변의 자연환경과 접하며 살아오면서 생존에 필요한 다양한 지식을 발견하고 습득해 왔다. 예를 들어, 원시인들은 사냥과 식량 생산을 위해 동물의 형태와 식물의 특성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동식물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얻었다. 좀 더 발전된 형태로 그들은 독초와 약초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도예, 직조, 금속세공 등에 대한 초보적인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김영식?임경순, 2002: 10)

따라서 우리가 지식을 게을리하는 자들은 그만큼 삶의 조건에서 유리하지 못하다. 심지어 지식이 없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기도 한다. 오죽 답답하면 60~70 고령의 할머니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했다고 신문지상에 나오겠는가? 간판의 글씨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헤매야 할 것이며, 버스 정류장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사방팔방을 뛰어다녀야 할 것이다. 아니면 비싼 요금을 물고 택시를 타야 할 것이다. 추석날 고속도로에서 ‘출구’라는 단어를 읽지 못하는 운전자는 고향길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옥상에서 내려오는 계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급한 김에 옥상에서 뛰어내릴 것이다. 가스가 위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지하철 폭발사건에서 낮은 포복으로 살아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식추구의 능력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다. 결국, 우리는 삶과 앎(지식)은 동본원적同本原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에게 아는 것이 삶이고, 삶은 앎으로서 풍부해진다. 한마디로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서는 알 수밖에 없다.
제임스 버크James Burke는 자신의 저서 [우주가 바뀌던 날 그들은 무엇을 했나](1995)라는 책에서 세상의 변화와 발전의 저변에는 ‘지식의 힘’이 있었으며, 지식은 인류의 삶과 가치를 이전 시대와 구분하는 분기점이 됐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인간에게 부여된 지식추구의 본능은 계속 살아남게 한 삶의 본능이자 원동력임에 분명하다. 결국, 인간에게 지식은 생존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필수적 생명의 에너지이다. 인간학적 시각에서 본다면, 지식의 필연성은 인간이 결핍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나와 너에 대해서, 자연세계와 인간의 문화에 대해서, 사물과 동물, 사건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앎을 향한 노력은 인간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와 모순,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신승환, 2012: 154)

그러나 세상에는 반드시 ‘좋은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지식’도 존재한다. 식자우환이라는 말도 있다. 지식을 유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줄 수 있는 지식도 허다하다. 또한, 잘못된 지식도 많다. 심지어 포스트모던의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의 지식이란 고정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라고들 주장한다. 오스트리아의 과학철학자 포퍼Karl Popper(1902~1994)의 ‘반증反證의 논리’에 의하면, ‘지식’도 반증이 될 때까지만 ‘지식’이다. 반증이 있으면 기존의 지식은 폐기된다. 과학적 방법을 통하여 얻은 진리는 경험적이며 귀납적인 것으로, 여기에는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이 언제나 존재한다. 즉, 과학의 발전에 따라 과학 지식은 그 의미와 내용이 변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적 방법은 경험에 입각한 귀납적 결론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과학적 방법에 의한 지식은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며, 언제나 반증 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과학에서는 새롭게 얻어진 연구 결과에 따라 이전의 지식이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있는 것이다(Christiaan Huygens(17632), ed. Keith R. Benson and trans. Robert Ellrich(1997), 163. Quotation selected by Bynum, 2005: 317). 이러한 맥락에서 아인슈타인은 “아무리 많은 실험을 하더라도 내가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 하나의 실험으로도 내가 틀렸다는 것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Calaprice(ed.), 2005: 291).
한마디로 지식은 언제든지 다른 지식에 의해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포퍼에 의하면, “과학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언명 또는 언명의 체계는 가능한 또는 있음직한 관찰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어야만 한다”(Popper, 1969: 39; 오히어, 1995: 82 재인용) “한 이론의 과학적 자격의 기준은 그 이론의 반증 가능성, 반박 가능성, 테스트 가능성이다.”(Popper, 1969: 37; 오히어, 1995: 40에서 재인용) “경험 과학의 체계는 경험에 의해 반박될 수 있어야 한다.”(Popper, 1923: 15; 신중섭, 1992: 41에서 재인용.) 즉 어떤 이론은 그 이론이 거짓임을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경우에는 과학이론이지만, 경험적 반증이 불가능한 이론은 과학은 아니다. 즉 포퍼는 과학의 증거로서 반증의 가능성을 들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학적 지식이라고 절대지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조건條件, condition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지식은 동일한 조건에서만 유효하다. 자연과학에서는 이를 ‘조건’이라고 하겠지만, 인문정신과학에서는 ‘상황’이라고 해야 한다.

독일계 미국인 문화인류학자 크로버Alfred Louis Kroeber(1876~1960)는 문화와 지식이란 모두 ‘가치의 현실화’를 기준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Bu?hler, 1962: 42). 즉 가치의 현실화가 되지 못하는 지식은 그것이 설령 중요하고 진실하더라도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헝가리의 화학자이며 철학자인 폴라니Michael Polanyi(1891~1976)에 의하면, 암묵지暗?知, tacit knowledge 암묵지는 행동, 모방, 통찰, 그리고 유추 등 네 개의 심리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생성된다(이홍 외, 2005: 29).
가 곧 ‘실용지식’이다(Polanyi, 1958). 오늘날 우리는 지식의 생명주기가 매우 짧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지식이 현실적 가치를 유지하는 시간이 짧아진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상대적 지식관은 역사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절대적 지식관이 지배하던 시절에 프로타고라스는 ‘내가 만물의 척도’라는 상대성 논리를 가지고 지식의 상대성을 주장하다가 처형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 II세에 의해 강력하게 주창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진리’로 군림했던 “천동설天動說”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 의해 한순간에 “지동설地動說”로 바뀌었다(김영식?임경순, 2002: 76). 천지天地 우주가 바뀐 것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은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 이러한 논제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심지어 사회체제와 지식탄생 간의 상관관계도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 과거 종교의 시대에는 종교가 사회체제를 구성했으며 이로 인해 지식의 구조 역시 결정되곤 했다. 서구의 중세 1000여 년의 역사가 대표적이다. 지금도 특히 불교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을 비롯한 동서양의 적지 않은 민족과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종교적 차원에서 대부분의 사회문화제도가 결정되고 있다. 이곳에서의 지식산출과 지식구조는 다분히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권위가 약화되면서 사회적 세력을 지배하기 시작한 ‘정치적 권위’는 르네상스를 거쳐서 교황 대신 황제 중심으로 사회질서가 재편되었던 ‘절대국가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이어서 사회질서를 재편한 세력은 경제적 권위 그 자체였다. 시장市場을 선점한 상공시민들의 발 빠른 움직임은 자유방임의 원칙까지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면서, 급기야 자본주의 경제사회가 도래했다. 이로써 경제가 시장뿐만 아니라 모든 삶을 결정했으며 사회제도 역시 경제적 권위에 의해 재편되었다. 결국, 오늘날 지식산출 및 지식유통 역시 ‘경제적 권위’에 종속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종교의 시대도 아니며, 정치의 시대도 아니다. 그렇다고 경제의 시대도 아니다. 즉 종교엘리트에 의해 이끌리는 시대도 아니며, 그렇다고 정치?경제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도 아니다. 물론 어제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미래 우리의 삶을 주도하고 우리를 이끄는 세력은 다름 아닌 테크놀로지Technology이다. 테크놀로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뉴 테크놀로지의 상징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1955~1911)의 위력도 이해하면 된다. 과거에는 종교, 정치, 경제가 세력과 권력을 형성하여 우리의 삶과 사회제도를 지배했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든 일상과 모든 사회제도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비평가이며 미래학자인 포스트만Neil Postman(1931~2003)은 21세기를 “테크노피아Technopia의 시대”로 선언한다. “테크노피아”란 기술이 신격화되고 모든 권위를 독점하는 문화적 현상을 말한다. 오늘날 기술이 인간의 사고와 행위 전반을 통제하고 있으며, 인간이 기술에 종속된 상황을 일컫는다. 애초 기술은 신의 진리를 추구하는 도구였지만 이후 신과 분리된 객관적 진리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그 자체가 신이 돼 인간을 지배하는 유일한 진리가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이미 우리는 모바일 선거, 즉 모바일 이동통신의 첨단 테크놀로지가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등 정치적 세력가와 권력의 운명을 갈라놓았던 경험을 한 바 있으며, 시장경제질서 역시 디지털정보통신혁명의 산물인 홈쇼핑, 케이블 방송, 인터넷쇼핑, 전자상거래 등 온라인 사이버 공간에서 재편되고 있다. 하물며 영상 매체를 통한 온라인 영상설교가 대세가 되고 있는 이 시대에 믿음 역시 테크놀로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세가 되고 있다. 결국, 오늘날은 테크놀로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다. 테크놀로지가 힘이고 국가 정부인 셈이다.

“한 사회가 경제 행위를 배분하는 방식은 구성원들의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미쳐, 마침내 새로운 사회규범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낡은 경제 행위와 그에 따른 규범들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며, 마침내 한 사회의 안정성을 침식해 들어간다. 부의 생산 양식과 소유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기술(테크놀로지) 발전의 힘은 20세기의 사회경제적 제도를 급격하게 변화시키거나 사멸시키게 될 것이다.”(이언 앵겔, 장은수 옮김, 2001: 6)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지식의 세계 역시 테크놀로지의 발달이라는 범주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즉 현대인들의 삶은 너 나 할 것 없이 테크놀로지의 운명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한동안 권력의 중심이 있었던 종교, 정치, 경제권에서는 테크놀로지를 장학하고자 할 것이다. 대혼란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앞으로 우리의 새로운 지식탄생은 모두 테크놀로지발달의 속도와 수준 등에 의해서 결정될 전망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항상 긍정적이란 말인가?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항상 선善, good인가?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의해 저질러지는 악惡, bad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니면 잘못된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지식은 우리의 삶과 무관한 지식인가? 다시 말하면,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의존되는 지식의 탄생은 과연 지식의 오랜 전통인 선에 의존된 지식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의 삶에서 ‘선악의 판단 준거’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결국 ‘지식’의 문제는 ‘지혜sophy’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는 동양의 지식관과 서양의 지식관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생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차이는 ‘지식을 추구하는 방법론’의 문제로부터 발생한다고도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 지식창출은 실증주의에 편중되어 있다. ‘방법론적 독점monopole’의 승리라고나 할까?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지식추구의 방법은 실제로 ‘방법론적 다수주의methodical pluralism’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철학적 지식방법론은 방법론적 단일주의(특히 실증주의, 과학주의)의 강력한 위세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뿌리였던 셈이다. 따라서 지식추구 및 지식창출에서 ‘방법론적 다수주의’가 다시금 새롭게 복권되어야 할 시점이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사실 규명에 매우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학문 세계에서 또는 지식추구 및 지식창출의 세계에서 융?복합 내지 통섭의 차원이 요청되고 있다. 본래 지식은 단일한 방법에 의해서만 탐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지식은 하나일지 몰라도 이를 추구하는 방법들ways, methods은 무척 다양하다. 이는 마치 산의 정상peak은 하나지만, 올라가는 길way은 다양하고 다수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직각삼각형의 공식, 즉 “c2(빗변의 곱)=a2(한 번의 곱)+b2(또 다른 한 변의 곱)”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를 입증해 내는 방법은 약 106가지 정도가 있다고 한다. 가장 정확한 하나의 답이 존재한다는 수학에서조차도 이렇게 답에 접근하는 (연구)방법은 다양하다.
독일의 대표적인 존재론적 철학자인 가다머의 대표작인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1960)의 원제목은 [방법 없는 진리Wahrheit ohne Methode]였다. 가다머가 그런 제목으로 출판사에 탈고한 것이다. 그러나 제목을 보고 책이 안 팔릴 것 같다는 판단을 한 편집장이 고집하여서 제목을 [진리와 방법]이라고 고쳤다. 편집장의 예상대로 책은 엄청나게 많이 팔렸다. 소위 대박을 맞은 셈이다. 가다머의 그 책 [진리와 방법]은 지금도 학계에서는 가장 꾸준히 팔리는 소위 스테디셀러steady seller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처음에 가다머가 제시한 그 책의 제목은 [방법이 없는 진리]였을까? 여기서 가다머는 당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실증주의 방법론(과학적 방법론)이 학계에서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되는 사실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며, 특히 진리의 세계는 결코 그러한 방법, 즉 실증주의나 과학주의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즉 진리의 세계에 접근하는 데에는 ‘특정한 하나의 방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방법적 다수성의 원리’는 어떤 학문에서도 적용되는 것이 극히 정당하다. 또한, 우리는 특정한 개념에 대한 통섭conciliation적 접근을 통해 지식의 본질적인 융복합성을 밝혀냄으로써 진실한 지식의 탄생을 기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프롤로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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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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