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코렐은 어떤 기운을 느꼈다. 눅눅하고 답답한 공기. 방에 들어갈 때는 아예 두 눈을 감았다. 솔직히 말하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음란한 생각도 한두 가지 얼핏 머릿속을 스쳤다. 근거를 따질 필요 없는, 자신에게조차 황당한 생각들이다. 두 눈을 뜨자 잔상들이 초현실적 장막처럼 방 안을 떠돌았으나, 침대가 나타나자 산산이 흩어져 다른 그림으로 변했다. 좁은 침대로군. 그 위에 한 남자가 똑바로 누워 있었다. 시체.
남자는 검은 머리에 서른이 갓 넘어 보였다. 입가의 하얀 거품이 뺨을 타고 흐르다가 말라 흰 가루만 남았다. 두 눈은 반쯤 뜬 채 돌출형의 둥근 이마 아래 깊숙이 파묻혔다. 얼굴은 평온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전체적으로 체념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코렐도 냉정하게 대처했어야 했다. 시체를 처음 본 것도 아니고 끔찍한 종말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욕지기가 치밀었다. 냄새 때문이겠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톡 쏘는 아몬드 향. 창밖의 정원을 내다보며 부적절한 생각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으나 그마저 협탁 위의 사과 반쪽을 보고 금세 깨지고 말았다.
--- p.14-15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이 논리학과 같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했어. 이른바 임의의 전제를 기초로 한 폐쇄 체계인지라 외부 세계에 대해선 아무 영향력이 없다는 뜻이지. 그 양반 주장에 따르면,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수학 시스템 내부에서는 문제가 되지만 실세계에는 전혀 무의미하다는 거야. 말장난, 두뇌 혹사에 불과하다는 거지.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쓸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어떤 기능도 불가능해. 칵테일을 마시며 농담 따먹기 하자면 모를까. ‘내가 거짓을 말하는 한 참이다, 라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난 참을 말한다. 고로 거짓이자 참이다, 라는 말을 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반복하라는 얘긴가? 완전히헛소리야.’ ”
“튜링은 동의하지 않았겠군요.”
“그래.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화를 냈어. 튜링을 설득하기 위해 발악도 했지.”
“성공하지 못했을 테고.”
“전혀. 앨런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어. 논리와 수학을 초월한다고 믿었지. 심지어 다리가 붕괴할 수 있다는 말까지 했으니까.”
“거짓말쟁이의 역설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수학의 기초에 다른 결함이 있을 수도 있겠지. 튜링과 비트겐슈타인은 내내 다리에 대해 논쟁을 벌였어. 다리를 세웠다가 무너뜨리기도 하고 삶 속에 온갖 종류의 기이한 이미지도 그려 넣었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튜링도 지쳐서 수업을 중도에 포기했어. 비트겐슈타인은 닭 쫓다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고.”
“그래서 누가 옳은 겁니까?”
“당연히, 튜링이지. 더 이상 얼마나 더 옳을 수 있겠나?”
--- p.241-242
“그래, 기계를 만든 젊은이는 어디에서 만날 수 있지?”
“튜링 박사 말씀이십니까, 수상 각하?”
차라리 묻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 사람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아예 앨런이 주변에 없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수행원들은 튜링의 방으로 우르르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중 일부는 튜링이 비교적 봐줄 만한 상태이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다만 트래비스가 너무 긴장한 탓에 깜빡 노크를 잊고 말았다. 그도 즉시 후회했다. 앨런이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 뜨개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망할 귀인은 1주일 동안 면도도 하지 않고 머리를 빗지도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지금은 기다란 청색 스카프로 보이는 물건에 흠뻑 빠져 있었다. 처칠조차 그 순간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 멋있군.”
그의 목소리에 앨런이 벌떡 일어났다. 앨런도 반쯤 겁에 질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아니…… 아닙니다…… 실제로…… 죄…… 죄송합니다, 수상 각하. 생……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어서요.”
튜링이 버벅거렸다.
“정말, 그런가? 불행하게도 뜨개질까지는 배우지 못했군그래. 어쨌든 충분히 이해하네. 좋은 아이디어는 완전히 다른 일에 몰두할 때 나오는 법이니까. 그렇지? 그리고 튜링 박사, 당신 생각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네. 적어도 내가 듣기로는 그랬어. 계속 일하게나…… 그리고 스카프가 예쁘게 만들어지기를 기도하지.”
다들 웃기는 했지만 몇몇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보다 기가 막힌 광경이 또 어디 있겠는가?
(……)
처칠이 나중에 트래비스한테 다음과 말했다고 했을 때도 팔리는 그저 농담에 불과했다고 믿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좋은 인력을 찾아내라고 했지만 자네가 정말 그 말을 그렇게 축어적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
--- p.490-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