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때 간절히 시인이 되길 꿈꾸었으나 시인으로서의 생이 두려웠다. 1995년에 경춘선 타고 춘천을 오가면서 썼던 오정희에 관한 글 「갇힌 불꽃의 몽상과 신화적 공간의 열림」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평론가의 길에 들어섰다. 2000년에 『극장과 숲』(월인)과 『전후의 상징체계』(이회)라는 연구서를 내고, 다음 해에 첫 번째 평론집 『문학의 저항』을 출간했으나 너무 서둘러 낸 탓에 부실했다. 늘 분서에의 욕망에 시달렸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언젠가부터 지지부진한 문비연 회원이다. 2002년부터 선문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하지만 만일 비평가가 추구하는 객관성이 율리시즈를 묶은 기둥 같은 것이라면, 비평가로서 그는 동시에 사이렌의 노래에 홀린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비평은 자신이 떠도는 텍스트 속에서 어떠한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는 맹목이기 쉽다. 많은 비평가들은 ‘언어의 감옥’에 갇힌 채―물론 비평가 자신은 전혀 이 갇혀 버림을 인식하지 못하기 일쑤다―알아듣기 어려운 헛소리들을 지껄이거나, 달콤한 말로 작가와 작품의 뒤에 숨어 있는 상인들에게 아첨하거나, 스스로 사이렌이 되어 독자들을 현혹할 따름이다. 비평은 그렇게 잊혀지고 있다. 하긴, 노르베르트 볼츠가 말하듯이 우리 문명이 ‘구텐베르크-은하계(활자문화)’의 끝에 서 있다면, 다만 비평의 죽음이 문학의 죽음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문학의 죽음조차가 어떤 문화의 전적인 부재라기보다는 그 변형 또는 진화를 의미하는 것일 테니, 비탄에 젖을 일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시대에, 그가 누구든 비평가라면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다시 한 번 모리스 블랑쇼의 『미래의 책』 서두에 자리잡고 있는 율리시즈의 항해를 떠올린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이 이 이야기로부터 문명 자체의 흐름을 간취해냈다면, 모리스 블랑쇼는 여기에서 소설의 탄생을 읽어냈다. 율리시즈는 길을 잃었고 오래 방황하지만, 그러나 언젠가 목적지에 도달할 거라는 희망조차 상실한 것은 아니다. 모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예언자 키르케는 이미 그에게 말한다. “이것을 주의 깊게 들어라. 그러면 신이 너의 정신을 무장시킬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이타카는 사이렌의 노래와는 상관없이 저 멀리에 외따로 존재하는 성소일 수 없으리라. 우리는 ‘헛것’이 출몰하는 이유를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안 된다. --- pp.18-19
그래도 어느 정도는 ‘부자되세요’가 대표적인 인사가 되어 버린 이 타락한 공화국의 시민들에게 부치는 한 인문학자의 편지였으면 합니다. 천박한 실용주의는 ‘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해롤드 블룸에 의하면 문학은 ‘다른 것으로 존재하려는 열망,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숭고한 동경’과 관련됩니다. 특별히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허위의 창문들Windows에 사로잡혀 있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문학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것에 대한 조문이 아니라 너무 서둘러 매장된 것들을 되살려내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우리가 꾸었던 꿈의 상실이 문제일 것입니다. 그 꿈을 찾아 헤매는 이 시대 작가들의 모험담과 좌절 심지어는 죽음 속에서 저는 율리시즈를, 바리데기를, 오르페우스를 보았습니다. 저도 ‘그것’을 가지고 나오고 싶었습니다. 조금 어렵게 여겨지는 부분들이 도처에 남아 있습니다. 돌파하든, 우회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자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읽든, 끝까지 가주셨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