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보
영감의 병은 차차 눈에 안 띄게 침중하여 들어갔다. 따라서 지 주사, 창훈이, 최 참봉 들 사랑 사람은 밤중까지 안방에 들어와 살다시피 되었다. 그러나 영감은 병이 더하여 갈수록 아들과는 점점 더 대면도 하기를 싫어하였다. 상훈이는 인사를 차려서라도 아침부터 와서 밤에나 자러 가지마는, 사랑에서 빙빙 돌 뿐이다. 영감이 요새로 부쩍 더 그러는 데는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돌아갈 때가 가까워서 그런지 덕기를 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편지를 띄우고 전보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회답이 없어서 영감은 가뜩이나 손자놈을 못마땅하게 생각은 하면서도 날마다 아침 저녁 차 시간만 되면 기다리는 터인데, 상훈이는 그런 줄은 모르고 시키지 않게 한다는 소리가,
'아버니 명환이 그렇게 침중하신 터도 아니요, 그 애는 졸업 시험이 며칠 안 남았으니 아직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요.'
하고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리었다.
--- p.280-281
'아버지의 홍경애에 대한 경우도 그랬을 거라. 돈 없는 아버지였더면 아버지보다 먼저 부탁을 받을 동지도 많았을 것이 아닌가. 아버지 경우나 내 경우나 돈 있는 집 자손이라는 공통한 일점에 똑같은 처지를 당하였을 뿐이지 무슨 숙명적 암합이 있을 리가 있나.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아버지답게 그 부탁을 이행하였을 따름이요, 나는 내 성격과 내 사상, 내 감정대로 이행해 가면 그만 아닌가?......'
덕기는 필순이가 '제이 경애'라고 한 모친의 말을 또 한 번 힘있게 부인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돈이란 뭐냐? 돈은 어디서 나온 거냐?......'
그는 필순이 부친이 아내나 딸을 자기의 돈에게 부탁한 것이지 돈 없는 덕기였다면 하필 더기에게 부탁하였으랴 하는 생각을 할수록, 마치 돈을 시기하고 질투하듯이 반문을 하여 보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 대한 자신의 대답은 덮어 두고 싶었다. 다만 '돈 없는 덕기'로서 지금 필순이 모녀에게 조상을 간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보다도 애통하는 필순이가 춥고 음침한 마루방에서 어떻게 이 밤을 새나 보고 오지 않으면 마음이 아니 놓여서 뛰어나온 것이었다.
덕기는 병원 문 안으로 들어서며, 아까 보낸 부의가 적었다는 생각이등자 노올 제 돈을 좀 가지고 올걸! 하는 후회가 났다. 그것은 필순이에게 대한 향의로만이 아니었다. '구차한 사람, 고생하는 사람은 그 구차, 그 고생만으로도 인생의 큰 노력이니까, 그 노역에 대한 당연한 보수를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도의적 이념이 머리에 떠오르는 덕기는 필순이 모녀를 자기가 맡는 것이 당연한 의무나 책임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 p.480-481
덕기는 안마루에서 내일 가지고 갈 새 금침을 아범을 시켜서 꾸리게 하고 축대 위에 섰으려니까, 사랑에서 조부가 뒷짐을 지고 들어오며 덕기를 보고,
"얘, 누가 찾어왔나 보다. 그 누구냐? 대가리 꼴 하고…… 친구를 잘 사괴야 하는 거야. 친구라고 찾어온다는 것이 왜 모두 그 따위뿐이냐?"
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하다는 잔소리를 하다가, 아범이 꾸리는 이불로 시선을 돌리며 놀란 듯이
"얘, 얘, 그게 뭐냐? 그게 무슨 이불이냐?"
하며 가서 만져 보다가,
"당치 않은! 삼동주 이불이 다 뭐냐? 주속이란 내 낫세나 되어야 몸에 걸치는 거야, 가외 저런 것을 공부하는 애가 외국으로 끌고 나가서 더럽혀 버릴 테란 말이냐? 사람이 지각머리가……."
하며 부엌 속에 쪽치고 있는 손주며느리를 쏘아본다.
덕기는 조부의 꾸지람이 다른 데로 옮아 간 틈을 타서 사랑으로 빠져 나왔다.
머리가 텁수룩하고 꼴이 말이 아니라는 조부의 말눈치로 보아서 김병화가 온 것이 짐작되었다.
--- 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