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해양활동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 육상유적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유물들이 점차 원래의 상태에서 변형되어 소멸해 가지만 바닷속 개흙(갯바닥이나 늪 바닥에 있는 거무스름하고 미끈미끈한 흙)에 묻힌 난파선과 유물들은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본래의 상태를 유지한다. 특히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침몰한 것이 확실한 난파선과 그 안에 실려 있는 유물들은 특정 시점의 과거 생활상과 사회상 등을 고스란히 간직한 ‘바닷속 타임캡슐’이 되어준다. 그러므로 육상에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귀중한 정보를 독자적으로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수중고고학이 갖는 가치는 더욱 크다.
육상발굴에서는 저습지 등 특정한 유적에서만 발견되는 유기유물이 수중 난파선에서는 다수 발견되는데 한 예로, 고려시대 배인 마도3호선에서 발견된 나무빗은 지금 사용해도 될 만큼 생생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또 같은 배에서 발견된 생선뼈는 말려서 포로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데 발굴 당시 뼈와 뼈 사이에는 누런 생선살이 마치 몇 달 전의 것처럼 아직도 고스란히 붙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발굴 당시 수중고고학자들에게 타임슬립(Time Slip)의 경험을 가져다 준 곶감도 있었다. 대부도2호선에서 발굴한 고려시대 곶감은 불그스레한 과육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곶감을 발굴한 수중고고학자들은 고려시대 곶감의 향을 직접 느껴보는 기적을 맛보았다. 바로 이런 것들이 수중고고학이 가진 매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학문적 차원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수중발굴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로 수중고고학은 당시 잠수장비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태동하게 된 무척 젊은 학문이다. 우리나라는 수중고고학이 1970년대에 이르러 시작되어 이제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어린아이 단계의 학문이자 동시에 가능성이 무한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장 보물선과 수중고고학의 탄생」중에서
신안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첫 발굴 조사는 1976년 10월에 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국내에는 수중발굴 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었고 기본적인 발굴 장비조차 갖추어지지 못해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수중발굴을 시작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이전까지 수중발굴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안선이 침몰된 바다는 시야가 매우 혼탁하고 조류도 강해 조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에는 유물이 매장되어 있는 지점을 찾지도 못해 결국 수감되어 있던 도굴범을 현장에 데려와 위치를 확인한 뒤에야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중조사는 해군의 해난구조대(SSU)가 실시하고, 조사원들은 바지선에서 잠수대원들이 구두로 전달하는 내용에 의존하여 수중상황을 기록하고 유물들을 정리하는 형태로 발굴이 진행되었다.
신안선 발굴 현장은 전남 신안군 증도와 임자도에서 각각 4km 떨어진 곳으로 여러 섬 사이에 형성된 해류 출입구에 해당되어 물살이 빠르고 물속이 어두웠다. 현장의 수심은 평균 20m 정도로, 조석(潮汐)에 따라 약 4m의 수심 변화가 있었다. 유속은 평균 2.5knot로 사리 때는 3.5knot, 조금 때는 1.5knot였다. 물의 흐름이 없는 정조 시간은 15분으로 이때를 기점으로 밀물과 썰물이 바뀌어 발굴은 이 시간을 중심으로 긴박하게 이루어졌다.
발굴 방법은 선체 위로 그리드를 설치하고 에어리프트로 개흙을 제거하면서 유물을 인양하는 방식으로 선상에서는 수중상황을 구두로 듣고 실측도면을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1976년 10월부터 시작된 신안선 발굴은 1984년 9월까지 이어져 무려 9년이라는 기나긴 시간과 11차례의 발굴을 걸쳐 완료되었다.
그 결과, 신안선에서는 도자기류를 중심으로 총 23,502점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동전 28ton(약 8백만 개), 자단목 1,017점, 선체편 450여 점이 발굴되었다. 발굴 조사에 따른 오랜 고생과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원나라 도자기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사실 신안선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이처럼 바닷속에 엄청난 유물들이 잠들어 있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신안선에서 발견된 고급 도자기와 금속유물 등은 순식간에 바닷속 보물에 대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수중문화재라는 개념과 수중고고학이라는 분야를 알리는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그 결과 1978년에는 신안선에서 발견된 유물의 보관과 전시를 위해 국립광주박물관이, 1981년에는 신안선의 보존처리를 위해 목포에 보존처리장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신안선 발굴 이후에는 수중문화재를 신고하는 사례가 속속 이어져 제주 신창리, 태안반도, 완도 어두리에서 수중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신안선은 지금까지 발굴된 중세시대 선박 가운데 세계 고고학사상 유례가 없는 대형 선박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수중발굴 성과로는 단번에 월척을 낚은 셈이다.
---「제3장_한국 최초, 세계 최대 보물선 신안선 이야기」중에서
2014년에는 수중문화재 발굴선인 누리안호에서 마도해역 시굴 조사를 진행하던 중, 9월 초 발전기 고장으로 인해 임시로 씨뮤즈호가 동원되었다. 이후 10월, 탐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로 만들어진 닻과 부서진 선체로 보이는 목재가 발견되었다. 가까운 곳에 새로운 배가 묻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던 중 약 30m 떨어진 곳에서 백자꾸러미가 발견되었고 그 주변에 선체가 묻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선체가 바로 마도해역에서 발견된 네 번째 선박인 마도4호선이다. 선체 조사를 시작하면서, 조사원들 대부분은 선체 내부에 또 다른 백자가 실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원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선체 내부의 흙을 조금 걷어내자 15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분청사기가 나타났던 것이다. 조사원들은 뜻밖의 발견에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 모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분청사기는 앞서 출수되었던 백자와 제작 시기가 40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아함을 해결하기도 전에 2014년의 조사는 겨울의 낮아진 수온으로 중단되었고, 6개월이 지난 2015년에 이르러서야 재개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마도4호선 내부에서는 백자가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고 분청사기 155점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앞서 발굴된 백자꾸러미는 마도4호선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백자꾸러미가 그곳에 묻혀 있던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현재로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5세기 초 마도4호선이 침몰한 이래 40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고 그 부근에서 또 다른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면서 배에 실려 있던 백자꾸러미가 공교롭게도 마도4호선이 묻힌 지점으로 떨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도해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해난 사고들을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추론이다.
마도4호선도 마도해역에서 찾은 다른 난파선처럼 목간을 통해 성격을 알 수 있었다. “나주(羅州)에서 광흥창(廣興倉)으로”라고 적힌 목간이 다량 발견되어 마도4호선은 나주를 출발하여 한양으로 향하던 중 마도해역에서 침몰한 조선시대 조운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도4호선에서는 세금으로 실린 곡물 외에도 공납품으로 실린 분청사기가 망태기에 담겨 있었다. 또 선원이 쓰고 신은 초립(草笠)과 짚신 등이 발견되었고, 선상에서 사용하던 뜰채도 발견되었다. 특히 숫돌이 꾸러미로 발견된 것이 특징적이다. 다른 난파선에서도 숫돌이 발견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꾸러미로 발견된 적은 처음으로, 선상에서 사용할 목적이 아닌 화물로 실려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숫돌은 마도4호선의 출발지인 나주의 토산품이었다. 따라서 나주 토산품 숫돌이 조운선인 마도4호선에 공물로 실렸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제4장_한국의 버뮤다 삼각지, 태안 안흥량 ‘조선시대 조운선, 마도4호선’」중에서
결국 당시 막내였던 양순석이 이 일을 맡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잠수도 배웠다. 그렇게 같이 잠수를 배운 직원들과 처음 나간 탐사가 2000년 고흥 시산도 앞바다였다. 수심 30m, 섬과 섬 사이에 위치한 그곳은 물살이 세고 수중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이제 막 잠수교육을 받은 상태에서 그런 위험한 곳을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양순석의 마음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물에 들어가서 조사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하강줄을 잡고 내려가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해저에 도착해서는 들고 간 줄로 기준선을 설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겨우 주변 1~2m 정도만 둘러보고 급히 올라오는 것으로 그의 첫 수중조사는 아쉽게 끝이 났다.
그렇게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군산 비안도, 십이동파도선, 야미도 발굴에 참여하면서 점차 경험이 쌓인 그는 이제 물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일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그사이 처음 함께 물에 들어갔던 동료들은 하나 둘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남은 양순석은 어느새 베테랑 수중고고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험난함 속에서도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게 이끌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무던한 성격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수중고고학만의 매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2007년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고려청자를 발견했을 때, 바닷물을 투과해 청자에 반사된 빛의 화려함은 정말이지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는 환상 그 자체였다. 전시실 유리 너머 잘 정돈되어 얌전히 놓여 있는 청자의 느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이 길을 포기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이유는 어쩌면 몇 백 년 전에도 빛났을 그 화려한 빛을 두 눈으로 확인한 그 순간, 그리고 그 빛을 자신의 손으로 꺼내 수면 위로 끌어올린 그 순간을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닫는글_수중고고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