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학교와 세명대학교 강사다. 중앙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겨레 부설 한겨레경제연구소와 미디어전략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고, 전략기획실 미래전략부에서 근무했다. (사)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2016년 총선미디어감시연대 활동에 참여했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 언론의 무보도 원인과 특성 분석을 통해 본 언론 윤리의 새로운 지향점 연구”(2016)가 있다. “언론 민주화의 위기와 송건호의 언론사상”(공저, 2012), “무(無)보도 현상과 언론윤리 그리고 한국 사회의 이념갈등”(공저, 2011), “프레임 분석에 있어서 무보도 현상의 적용 효과 연구”(공저, 2010)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언론 개혁을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각성과 참여의 연속성 위에는 다양한 변화의 시도들이 있었다. 운동의 목적과 참여 주체에 따라 내용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민이 주체가 되었던 언론 운동의 여러 사례를 살펴보면서 운동의 의미와 성과를 살펴보는 것은 새로운 시민 언론 운동의 내용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과거 언론 민주화를 위한 시민운동은 국가권력과 자본 권력의 언론통제에 강렬히 저항했다. 국가권력의 제압 속에서 권력 헤게모니의 재생산에 일방적으로 기여하는 언론사가 있을 때 시민들은 언론사가 보이는 거리 앞에 모여 진실을 보도하라는 구호를 크게 외쳤다. 이윤 추구의 논리에 맞춰 권력에 유착하는 언론의 보도가 문제가 되었을 때에는 구독을 끊거나 시청료 납부를 거부하는 집단 시민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시민 언론 운동의 연속성과 변화」중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언론 자유가 위축되었다고 보기 어려웠고, 자발적으로 권력에 협조하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이 있은 직후에도 표면적으로는 언론 활동이 자유로운 듯이 보였다. 그러나 점차 기관원 출입이 잦아지기 시작했고 언론사 내부에서 알아서 협조하는 분위기가 점점 커져 갔다. 1969년 6월경부터 대학가에는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연일 터졌다. 언론은 지면을 통해 3선 개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 정당성을 강화해 주기 위한 보도만 내보내는 상황이었다. 언론의 왜곡된 모습에 시민들의 불신이 만연해지고 있었다. ---「격려 광고 운동」중에서
안티조선 운동은 시기별로 변모했다. 안티조선 운동은 처음부터 언론 개혁 운동을 표방하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실상을 폭로하고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공유하면서 개혁 운동의 필요성이 점차 커져 갔고 동참 의사를 밝힐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다. 노무현 대통령과 조중동 신문 사이의 불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참여정부의 언론관이 사실상 안티조선 운동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면서 안티조선 운동을 지속하는 동력이 많이 줄어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