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연방(Union)과 남부연합 간에는 전투만 없었을 뿐이지 사실상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연방군 요새인 섬터에 보급품이 고갈되고 있었다. 섬터 요새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연방군을 보내 지원할 것인가를 놓고 링컨은 여러 장군들과 보좌관들과 함께 백악관에서 잇따라 회의를 거듭했다. 백전노장 윈필드 스콧은 섬터는 굳이 무리해서 지원할 만큼 군사적 가치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해군장관 기디언 웰스(Gideon Welles)는 이 요새를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 역시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피하려면 섬터를 포기하고 남부연합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링컨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요새를 지원할 것을 결정했다. 링컨은 ‘강요’가 아니라 ‘설득’이라는 자신만의 장점을 이용하여 보좌관들과 장군들을 설득했다. --- p.6
궁극적으로 1850년대의 갈등과 위기는 단순히 정치적 차원만이 아니라 더 깊은 사회적?문화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에서 해리엇 스토(Harriet B. Stowe)는 비슷한 성격을 가진 두 형제(한 명은 자유 토지의 “바위와 돌이 가득한” 버몬트에 정착했고, 다른 한 명은 노예제도로 인하여 “사람을 지배하는” 루이지애나에 정착했다)를 이야기하면서 문화적 갈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형은 교회 집사로 지역 노예제도폐지협회 회원이 되었는데 본래는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했지만 여기에서는 평등사상이 강한 인물이 되었다. 반면 동생은 신앙에는 전혀 무관심해지고 남부 귀족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노예제도 신봉자이자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었다. 스토의 이러한 비교에는 편견이 들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노예제도와 자유에 대한 대조되는 환경이 너무나 비슷했던 두 사람을 세계관의 첨예한 갈등을 겪는 사람들로 만드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pp.12~13
9월 17일 수요일 아침이 밝았다. 남북전쟁 기간 동안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북군은 총 8만 7,000명이었고 남군은 5만 명이었다. 날이 밝아오고 난 후부터 밤이 되기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공방이 이어졌다. 전세는 엎치락뒤치락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병력과 물자가 많은 북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해가 넘어갈 무렵 남군 전선이 막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매클렐런은 전투 중지를 명령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링컨은 적에게 마지막 결정적 타격을 가하라고 명령했지만 매클렐런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리의 남군이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로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허용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많은 역사가들은 만약 이때 매클렐런이 한 번만 더 세차게 남군을 공격했거나 또 후퇴하는 리의 본진을 공격했다면 남북전쟁은 훨씬 일찍 끝났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 p.60
북부연방의 승리로 끝난 남북전쟁은 약 6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냈다. 이것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치른 모든 전쟁에서 희생된 수보다 더 많았다.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남북전쟁 역시 복잡다단한 수많은 결과를 낳았다. 정치적으로 미국은 지역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연방국가의 형태를 띤 하나의 국민국가로서 시금석을 낳았다. 사회적으로는 완전히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명목상으로나마 노예해방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민주주의국가를 만들어냈다. 경제적으로는 남부의 농업 중심보다 북동부의 상공업 중심으로 자본주의 발달을 촉진시켜 자유방임을 통한 거대기업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 p.74
사람은 본성적으로 비난보다 칭찬을, 명령이나 강요보다 설득을, 복수나 적의보다 관용과 용서를, 냉랭하고 굳은 분위기보다 부드럽고 유연한 유머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링컨은 알았고, 그것을 실제 삶에 적용했다. 1864년에 「뉴욕 해럴드(New York Herald)」지는 링컨의 본성과 관련하여 “누구나 알고 있는 아주 평범한 상식, 친절한 마음, 목표를 향한 열정, 그리고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예민한 감각을 가진 링컨의 본성이 다른 사람이면 수렁에 빠지게 만들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라고 논평했다. --- p.76
링컨은 연방을 보존하고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통령으로서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그는 섬터 요새 전투 이후 군대동원령을 내렸으며, 버지니아와 텍사스까지 봉쇄하는 선전포고문을 발표했고, 나아가 인신보호영장 청구권을 중지시키는 일까지 단행했다. 이에 대법원장 로저 토니는 오직 의회만이 인신보호영장을 일시 중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링컨을 비난했다. 심지어 링컨을 독재자나 전제군주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목표 달성을 위한 링컨의 노력은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