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나혁진은 국내 최대 추리소설 마니아들의 커뮤니티 《하우 미스터리》의 부운영자. 인천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현재도 인천에서 살고 있다. 시공사, 들녘, 작가정신 등의 출판사에서 편집자 생활을 했으며, 총 30여 권의 소설을 책임 편집했다. 황금가지에서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1』에 참여했고, 현재 영화화가 진행 중인 장편 데뷔작 『브라더』를 2013년 출간했으며, 2014년에는 두 번째 장편소설 『교도섬』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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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 내가 말한 거 다 헛들었어. 다시 한 번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 유령은 남녀 두 명이야. 얼핏 남자 유령은 30대 초반, 여자 유령은 20대 후반쯤으로 보인대. 참고로 여자 유령 이름은 마리, 남자 유령 이름은 루이야. 최초 목격자는 2학년 6반 반장. 며칠 전에 걔가 반 애들 불우이웃돕기 성금 걷은 봉투를 책상 서랍에 놓고 온 걸 집에 가서 안 거야. 그때가 자정이 넘었지만 불안해서 어떡하냐. 급히 학교로 돌아왔지. 경비 아저씨가 교문을 열어줘서 다행히 봉투는 찾았는데, 그때 보게 된 거라. 와인색 원피스를 입은 마리와 정장 차림의 루이를 말이야. 참, 유령답게 둘 다 다리가 없었다더라.” ---「프롤로그: 벚꽃의 요정」중에서
“소민 씨에게 힘든 이야기 같으니까 내가 하죠. 방금 어머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셨답니다. 교통사고로 그만 돌아가셨군요.” 원래도 작지 않은 소민의 눈이 두 배는 커진 걸 보니, 이길준의 답이 과녁 정중앙에 적중한 것 같다. 탄력을 받은 이길준이 내처 말했다. “어머님 함자에 ㅇ, ㅅ, ㅈ 중 한 가지라도 들어가죠?” “맞아요.” (……) 엉덩이를 반쯤 들었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털썩 주저앉았다. 나야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끝이지만, 영문을 모르는 소민이 이길준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앞으로 그가 저지를 사기 행각이 눈에 빤히 보이는데 도의상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적어도 소민이 알아듣도록 설명해주고 가기로 결심했다. “이길준, 네 수법은 너무도 뻔했어. 소민 씨라고 했죠? 잘 들어요, 소민 씨. 이길준이 어머님 성함에 ㅇ, ㅅ, ㅈ이 들어가는 걸 맞힌 건…….” ---「1장 황무지 Wasteland 」중에서
“이번만큼은 아마 틀림없을 거예요. 여기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쯤 가면 삼정산(三丁山)이라는 곳이 나와요. 참고로 그 산은 통째로 우리 집안 거죠. 그곳에 우리의 다섯 번째인가, 여름별장이 하나 있어요. 선친께서 그곳에서 영면하시는 바람에 저도 이번에 처음 가봤는데, 마침 별장지기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 별장지기는 어릴 적에 화재로 고아가 됐다고 해요. 고작 열다섯 살 때. 그래도 다행히 근처의 부유한 가문에서 소문을 듣고 거둬주기로 했답니다. 잔심부름을 하는 대신에 학교도 보내주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엄청난 은혜였겠죠. 그런데 별장지기가 그 가문의 저택에 살러 간 지 1년이 채 안 돼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대요.” 묘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소민이 꿀꺽 침을 삼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저택에서 영혼의 소행이 아니고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살인사건이 일어나 두 명이나 죽었답니다. 별장지기는 그곳에 머물면서 사건의 전모를 똑똑히 보았다고 해요.” ---「2장 진홍색 하늘 Crimson Sky 」중에서
지연과 왔던 날에 일어났던 일들이 3년의 간격을 두고 고스란히 다시 일어났다. 한 가지라면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연이어 네 가지 일이 반복되는 경우의 수가 과연 존재할까? 이것은 어쩌면 지연의 강렬한 의지가 아닐까? 소민에게 점점 더 깊이 이끌리는 나를 벌주기 위해 지연이 현실에 개입한 걸까? 나로 하여금 3년 전의 일을 기억하게 만들기 위해 똑같은 사건들을 만들어낸 걸까? 답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내 주변에서 뭔가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