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긴 끈을 잡고 앞으로 나온 사람은 바로 백 원짜리 순백이었다. 맙소사! 이건 정말 심술궂은 운명의 장난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 안 돼. 어떡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한 사람은 여주였다. 호태가 나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순백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코끼리나 입으면 어울릴 법한 펑퍼짐한 바지에 목이 잔뜩 늘어난 후줄근한 티셔츠 차림을 하고 히죽 웃는 꼴이라니. 녀석은 내가 운명의 짝이 된 게 아주 흡족한 모양이었다. --- pp.35-36
미리 예상했던 대로 숨이 막힐 만큼 비좁고 답답했지만 다행히 바퀴벌레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살림살이도 옹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도령아, 여긴 내 동생 동백이야.” 나는 문짝에 누런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싱크대를 살피다가 순백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거실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방 한쪽에 핏기라곤 찾아보기 힘든 허여멀건 사내아이가 머리에 압박 붕대 같은 걸 친친 감고 누워 있었다. --- pp.116-118
“나도령, 넌 잘난 부모 밑에서 편하게 잘 살고, 어디서도 꿇릴 게 없으니까 인생이 기분 좋은 선물 같지? 순백이랑 난 안 그래. 우린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란 말이야. 난 네가 자기 힘으로 얻은 배경도 아니면서 잘난 척하고 순백이를 멋대로 업신여기는 걸 볼 때마다 너한테 정말로 그럴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었어. 순백이 소원이 뭔 줄 알아? 딱 하루만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던 그때로. 나도 비슷해. 그런데 우리가 일 년 내내 아무리 착하게 굴어도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 너 같은 애들한테 손가락질이나 동정을 받으면서 그저 견뎌 내는 거지. 그래. 우린 사는 게 아니라 견디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우릴 짓밟지 마. 세상에 하찮은 삶이나 사람은 없어.” 현명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내 심장을 콕콕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