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에 아이디어 수첩을 펼치고, 만년필로 먼저 ‘앞으로 남은 6개월을 어떻게 살 것인가 기획’이라고 적어 보았다. 대개는 남은 시간을 가족과 지내며 간병 속에서 죽어 간다. 내가 생각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사라지고 난 후에 아내와 아들이 웃을 수 있는 기획이다. 그게 어떤 기획인지는 아직 전혀 알 수가 없다. 상당히 힘든 숙제다.
아이디어 수첩을 훑다 보니, [기획을 생각하지 말고 ‘기분’을 기획으로 해야 한다!]는 문장이 눈에 띈다. 방송작가는 예술가가 아니다. 늘 시청자의 요구에 대응해야 하는 서비스업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 시청자가 보고 싶은 것을 ‘즐거운 것’으로 변환해 기획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날부터 기획이 통과되지 않아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으며, 내 프로그램을 보다가 채널을 돌려도 풀 죽지 않았다. 거실에서 웃는 얼굴을 상상하며 열심히 하자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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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꿈꾸는 남녀가 저마다 자신의 이상에 대해 말했다. 현실을 알려 줘야만 한다. 조용해진 가운데 나는 입을 열었다.
“저기요, 결혼생활을 통해 안락함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다시 주위에 술렁임이 이어졌다.
“남자는 밖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기 때문에 집에서만큼은 아내의 위로를 받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가정에서 더욱 연기를 해야만 합니다. 긴장을 풀면 안 됩니다. 집 대문을 연 순간부터 연기를 해야만 해요. 슈퍼맨도 변신하지 않으면 괴수에게 이길 수 없어요. 위로 받고 싶다는 이유로 결혼하면 후회합니다.”
흥분해서 우리 집의 경우를 말하고 말았다……. 뭐, 이렇게 된 이상, 그냥 가 볼까?
“난 부부가 와인을 마시면서 DVD 같은 걸 보는 게 꿈인데요.”
7대3으로 가르마를 탄 남자가 말하자, 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때가 행복한 겁니다. 같이 술을 마시면서 텔레비전을 보노라면 아내가 ‘이게 뭐야?’ 하고 귀여운 목소리로 질문합니다. 그 말에 대답하면 안 돼요. ‘이건 말이지.’ 하고 자세히 설명하려고 하면 ‘쉿, 조용, 지금 중요한 장면이야.’ 하고 말합니다. 자기가 먼저 질문해 놓고 말이죠. 그럼 이쪽은 할 말을 잃고 아내의 옆얼굴을 보면서 굳은 표정을 짓게 되는데, 부부 사이에 흔히 있는 풍경입니다. 하지만 그런 걸로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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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왜 아내의 결혼상대를 찾으려는 거죠?”
“그건.”
“그건?”
“좋은 가족이기 때문에, 내가 없어져도 끝내고 싶지 않아요. 좋은 프로그램은 사회자가 바뀌어도 계속되잖아요. 그래서 확실하게 이토 씨와 만나 바통터치할 거예요.”
“정말, 미무라 씨는 무엇이든 다 프로그램과 결부시킨다니까요.”
“만약 들통이 나면 회사 신용도는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기획이 재미있어서 수락한 거잖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죠.”
“…….” 이런 일에 끌어들여,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사무실에서 나오자 이메일이 와 있었다. 아내에게서 온 것이었다. 제목에 감탄부호가 세 개나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혹시 내 병이 들킨 건가? 조심스럽게 이메일을 열어 보았다.
‘요이치로가 시험에서 백 점 맞았어!’ 답안용지 사진도 첨부되어 있다.
아들도 노력하고 있다. 기쁨과 동시에 지금까지 신경 쓰이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들에게 내 병에 대해 어떻게 말하지? 아들뿐만 아니라, 부모님께도 알려야만 한다. 아내 못지않게 어려운 문제다.
아무튼 지금은 아내의 결혼상대를 찾는 데 집중하자. 눈앞에 있는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그러고 나서 아들과 부모님께 말하자. 남은 시간은 앞으로 한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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