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라는 도시는 밤이 되면 거리의 냄새가 바뀐다. 스쿠터나 자동차의 소음이 줄어든 만큼 가로수들이 활기를 띠는지, 도시 전체가 숲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변한다. 실제로 런아이루나 둔화베이루 같은 큰 거리는 도로에 가로수를 심은 게 아니라 가로수 속에 도로를 만든 것처럼 보일 만큼 나무가 많아서, 밤이 되면 도시의 네온 불빛에 반사된 환상적인 남국의 숲이 떠오른다. 밤에 여기 런아이루를 걷다 보면 하루카는 왜 그런지 맨 처음 이 거리를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이미 육 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때는 설마 자기가 훗날 이 거리에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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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즈는 젖은 티셔츠를 다시 짜서 운동복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스쿠터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아즈?”라고 부르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웨이즈 앞에 조금 전에 본 스쿠터가 멈춰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구아바의 젖은 잎에 둘러싸여서 햇볕에 그은 가느다란 다리가 지면으로 쭉 뻗어 있었다. 웨이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즈 맞지? 나야, 나, 창메이친” 하고 여자가 웃었다. “어? 어, 어어? 아, 아아, 아메이?” 소꿉친구인 창메이친은 분명 잘 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메이친과 눈앞의 여자는 너무나 달랐다. 횡설수설 어물거리는 웨이즈에게 “왜 그래, 혀라도 꼬였니?”라며 메이친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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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는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에릭을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갔다. 구 년이라는 세월이 도려내져서 구 년 전과 지금이 잇닿은 것 같았다. 시간이 만약 리본 같은 것이라면 구 년의 길이를 잘라내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 붙인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도려낸 구 년의 리본은 어디에 있을까. 하루카는 무심코 발밑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두 사람의 발밑에 잘라낸 리본이 떨어져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하루카는 크게 휘젓는 에릭의 팔로 시선을 돌렸다. 착각이라는 건 알지만 에릭이 그 손에 리본 끄트머리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카는 하늘하늘 흔들리는 리본의 다른 한쪽 끝을 잡으려고 반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흔들리는 리본은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
--- p.246~247
“그 사람, 좋아해?” 가까스로 나온 말이 그거였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카는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그 사람, 좋아해?”라고 묻고 만 것이다. 땀이 솟구쳤다. 하루카도 조금 놀라워했다. 렌하오는 이 분위기를 빨리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고베의 대피소 광경이 또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렌하오의 입술이 움직였다. 움직인 동시에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사람, 좋아해?”라고 렌하오가 거듭 묻고 만 것이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던 하루카가 “그 사람이…… 걱정돼”라고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한순간 혼란스러웠다. “그 사람이 좋아”라고 말할 거라고 확신하면서 “좋아하지 않아”라는 말을 해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돌아온 말은 두 가지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 p.288~289
두 사람 사이에 육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놓여 있는 건 아니었다. 공항 한 귀퉁이에서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는 머나먼 날에 둘이 함께했던 농밀한 시간이 보였다. 찌는 듯 무더워서 잠들지 못했던 여름날 밤, 기분 전환 삼아 산책이라도 나가자며 데리러 왔던 나카노의 얼굴이 떠올랐다. (…) “……나, 왔어”라고 가쓰이치로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래, 잘 왔어”라고 나카노도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내미는 나카노의 손을 가쓰이치로가 부여잡았다. 그 감촉을 서로 확인하듯 힘껏 움켜잡았다. 그 힘이 남아돌아 나카노의 가슴이 부딪쳐왔다. 가쓰이치로도 지지 않으려고 그 등을 꽉 끌어안았다. 그 순간, 가쓰이치로의 입에서 저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요코가, 요코가 죽었어”라고. (…) 가쓰이치로는 자신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요코가 죽은 후로, 아니 육십 년도 더 전에 이곳 타이완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날 이후로 줄곧 가슴 깊은 곳에 파묻혀 있던 뭔가가 지금 별안간 쏟아져 나왔다.
--- p.357~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