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전부 일곱 번이야. 그렇지만 내가 사귀었던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아냐. 세이지는 스기모토가 모르는 좋은 점도 있었어.”
돌발적인 분노는 겨우 잠잠해지려고 했다. 목소리의 크기를 바꾸지 않고,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알아. 그렇지만 나쁜 건 하나야. 하나가 울지 않으니까 안 되는 거야. 지금도 세이지를 좋아하면서 그걸 인정하지 않잖아. 심하게 상처 받았으면서 그걸 감추려고 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시작하지 못하는 게 있는 거야.”
점점이 떠 있는 등뼈의 돌기 옆에 진한 그림자가 두 가닥 생겼다. 하나의 등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 p.32~33
“난 꽤 즐거운걸. 난 취하면 키스 귀신이 돼 버려. 아까부터 오늘은 누가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냐.”
유미의 눈이 아몬드 모양으로 치켜 올라갔다. 눈동자 역시 구운 아몬드처럼 밝은 갈색. 눈 밑의 볼록한 애교 살이 매서운 인상을 완화해 주었다. 그녀는 나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줄곧 내 눈을 보고 있었다.
“세토, 그거 누군지 알아?”
누구라도 대답을 알 수 있는 수수께끼였다. 나 역시 그렇게까지 둔하지 않다.
“난가.” --- p.41
그 봄날 밤 이후로 나는 미운 오리 새끼와 종종 파라다이스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사만 할 때도 있고, 가끔 한 시간 이상 키보드를 두드리며 농담을 하거나 서로 웃기도 하고, 어릴 때 추억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의 거리를 두는 태도에 변화는 없었다. 일정한 선을 넘어 친밀한 감정을 드러내거나 스스럼없이 틈을 보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애인이 있는 친한 동급생이나 직장 동료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못생겼으니까” 콤플렉스 탓인가 생각했지만, 나는 신중하게 그 화제를 피했다. 섣불리 언급했다가는 그녀가 또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풀숲에 숨은 메뚜기 같았다. 멀리서 마른 가지를 밟는 발소리만 감지해도 폴짝 뛰어서 다른 풀로 숨어 버린다. 못생김에 대한 그녀의 신경은 지나치게 예민했다. --- p.72
“당신은 왜 여자를 사귀지 않아요? 전혀 상관없지만, 혹시 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글쎄요.”
에토 준코는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노출 콘크리트의 까슬까슬한 벽면과 겉으로 나와 있는 시커먼 에어컨 배관이 배경이었다. 촛불이 켜진 레스토랑보다 에토 준코에게 잘 어울렸다.
“마음만 먹으면 여자를 사귀겠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다들 너무 연애 의존증이에요. 언제나 설레고 싶어 하고, 하이에나처럼 쉼 없이 사랑을 찾아다니죠. 텔레비전의 유치한 러브 스토리를 너무 많이 봤어요. 병입니다.”
“흐음.” --- p.100~101
조그마한 전단 오른쪽에는 ‘시부야 최초의 슬림하고 키 큰 아가씨 전문점! 체인지?2회전 오케이!!’라고 금색 글씨가 자랑스럽게 박혀 있었다.
가장 최근에 여자와 잔 게 언제였더라. 적어도 1개월 단위로 손가락을 꼽아야 할 옛날이었던 건 확실하다. 히로토는 귀찮은 일이 싫었다. 혼자 사는 히로토에게는 이 세상에 귀찮은 일이 두 가지 있다. 일과 연애. 작은 편집 프로덕션에서는 일을 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번거로운 것을 싫어해서 착수하기 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히로토는 일에서는 유효한 이 힘을 여성에게는 사용하지 않았다. 일은 하지 않으면 생활을 해나갈 수 없지만, 연애는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쾌적하게 살 수 있다.
히로토는 좁은 전화 부스에 멈춰 서서 잠시 그 전단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찢어지지 않도록 뜯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지루해 보이는 표정 그대로, 먼지로 부예진 유리 상자를 나와 시부야 거리로 돌아왔다. --- p.120
그쪽 세계를 잘 모르는 시로지만, 아주 확률이 낮은 일이란 건 알고 있다. 연속극을 의뢰받아 화면에 이름이 나오는 각본가는 극히 소수의 잘나가는 작가뿐이다.
시로는 요코의 꿈을 응원하고는 있지만, 실현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때야말로 자신이 있었다. 시로는 안전망 같은 것이다.
…… 요코는 아이처럼 꿈을 꾸는 사람이니 하늘만 보다가 발밑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꿈이 깨져서 높은 곳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는 요코처럼 꿈을 꿀 힘은 없지만, 그럴 때 그녀를 지탱해 주는 매트리스 정도의 역할이라면 분명 할 수 있다. 마치 지금 밤샘을 한 요코가 쌔근쌔근 자고 있는 부드러운 침대처럼.
시로는 잠든 요코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요코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매트리스 끝에 살며시 누웠다. --- p.155
그날 밤 메일을 보내고, 평소보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어둠 속에서 본 적 없는 유키를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고, 그러면 다음 날이 빨리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즈키는 어느 샌가 새로운 아침을 기대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자신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연애를 하는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 그때부터 거의 매일, 밤마다 짧다고는 할 수 없는 메일을 주고받는 것이 미즈키의 일상이 되었다. 유키에게서는 다음 날이면 반드시 답장이 와 있었다. 서로의 핵심은 언급하지 않는 소소한 화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미즈키는 만족했다. 내용보다 미즈키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유키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서 기뻤다. --- p.183
“그렇게 사치스러운 소리만 하니 일 년 반이나 남자 친구가 안 생기는 거예요.”
너처럼 열두 살 이상 연상인 유부남한테 끌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지만, 사쓰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키네는 일과 관련된 지인 중에 몇 안 되는 사쓰키의 이해자로, 사쓰키네 회사에서 발행하는 홍보지 아트디렉션을 맡고 있는 ‘트랜스 페어런트’라는 디자인 회사 대표였다.
“그렇지만 지난 십이 년 동안 그런 사람이 네 명 있었어.”
“벌써 몇 번째 들었어요. 화가 두 명, 유리공예가와 도예가 한 명이죠. 그런데 기껏 재능을 발견하고 함께 애써 놓고, 어째서 성공하면 헤어져요? 프러포즈도 거절하고.”
그것은 사쓰키도 잘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명성을 얻는 순간, 왠지 마음이 식어 버린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마음의 움직임이었다. 화가 중 한 명인 나오키는 울면서 헤어지지 말아 달라고 매달렸지만, 상대를 자를 때의 사쓰키는 여느 여자들보다 차가웠다. --- p.249
후미히로의 친구 사이에서는 여자 친구와 능숙하게 헤어지는 것이 예의였다. 대판 싸우거나 눈물 바람을 하는 이별은 최악으로, 둘 사이에서라면 몰라도 다른 친구 앞에서는 깨진 커플들도 록밴드 해산 회견처럼 깔끔하게 했다.
앞으로 나아갈 음악성이 좀 다를 뿐입니다.
누구든 발전적이면서 담백한 연인 관계 해소라고 하는, 거의 승산 없는 투쟁을 연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날 후미히로와 와카코도 흔히 사용하는 엔딩 방법을 시도하게 되었다.
굿바이 데이트.
…… 인간이 하는 일의 9할은 자신도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 하는 것이다. 사용한 휴지처럼 지저분한 탤런트의 인터뷰를 사탕 같은 말로 꾸며 준다. 다른 남자로 바꿔 탄 동거 상대와 추억의 데이트 코스를 한 바퀴 돈다. 둘 다 바보 같은 짓인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왕 하려면 제대로 할 수밖에 없다.
--- p.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