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 시인의 시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이것은 그의 살아가는 모습이 한없이 유연하고 너그러우면서도 눈앞을 막아서는 불의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김준태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을까? 아마 그의 첫 시집 『참깨를 털면서』가 창비사에서 나온 1977년 초가을인 것 같은데, 이때 지방에서 올라온 김준태를 종로에서 만나자마자 우리는 곧 근처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나누고 회포를 푼 생각이 난다. 그와 나와의 우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김준태는 광주에서 고등학교 선생으로 있었는데, 우리가 만난 지 3년 만에 일어난 5ㆍ18 광주항쟁 때 결연히 붓을 잡고 그 무지막지한 군부세력의 폭압에 맞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란 저항시를 신문에 발표했다. 그것이 이 나라의 민중들을 일으켜 세우는 도화선의 하나가 되었다. 그 불꽃은 지금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김준태는 결국 그 시를 발표한 탓에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학교에서 쫓겨나 지금은 5월 항쟁의 진원지인 광주에 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김준태의 시를 읽는 감동은 이런 저항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나라 밖의 여러 곳을 다니며 만난 시인들과 주고 받은 시도 있고, 2001년 8월 평양에서 열린 6ㆍ15선언 1주년 기념 축전 때 남북의 작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낭독한 「백두여, 통일의 빛나는 눈동자여!」란 시도 있다. 김준태는 책상 앞에 앉아 시만 쓰는 시인이 아니다. 이 나라의 남북은 물론 세계 각지를 다니며 시를 쓰는 행동하는 시인이다. 이제 칠십을 바라보는 시인이 뒤늦게 얻은 쌍둥이 손자를 바라보며 “한 놈을 업어주니 또 한 놈이/자기도 업어주라고 운다/그래, 에라 모르겠다!/두 놈을 같이 업어주니/두 놈이 같이 기분 좋아라 웃는다/남과 북도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쌍둥이 할아버지의 노래」도 예사로 보아넘길 시가 아니다. 시인의 바람처럼 큰 기쁨이 있기를 빈다. 민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