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제21회 외대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장편소설 '백두산맥', '쪽바리아드님', '도라산역'(1, 2), '천추태후', '명성황후는 시해 당하지 않았다'를 출간했으며, 일간 스포츠월드에 장편소설 '요동별곡'을 연재했다. 일본과 중국에 의해 찢기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 고조선과 대진국(발해)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잃어버린 영토 요동과 대마도 수복을 위해 힘 있는 통일 조국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도대체 이 나라가 누구를 위한 나라라는 말인가? 백성을 위한? 아니면 중신을 위한?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나라라는 말인가…? 왕손을 번영하게 한다는 핑계를 내세워 당사자는 마음에도 없는 강제 혼사를 시켜 자신의 영달을 챙기려는 저들을 어찌할 수 없는 왕실은 도대체 무슨 존재인가?”
정묘호란으로 형제의 의를 맺었던 후금은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황제국임을 자처하면서 조선에 군신관계를 맺을 것은 청한다. 하지만 조선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청나라는 30만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질주하고, 조선 조정은 화친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 화친을 위한 사신으로 청나라에서는 왕제를 원하지만 조선에서는 가짜 왕제를 보낸다. 하지만 그 사실이 발각되면서 사신을 수행했던 박난영 장군이 목숨을 잃고 왕제를 속인 것을 알게 된 청나라에서는 세자가 나오지 않으면 화친을 논할 수 없다고 조건을 한 단계 높인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음에도 조선은 갈팡질팡만 하는 사이 결국 청나라가 화친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해 온다. 조선은 그제서야 화친을 주선해 달라며 적장 용골대와 마부대, 역관 정명수에게 뇌물을 주고 용골대는 화친을 주선하려한다. 그러나 인조는 나와서 항복하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굳이 문서로 항복을 하겠다고 몸을 사린다. 그러자 청나라에서 화친은 없다며 다시 통보해 오고 소현세자가 직접 나선다. 소현세자의 이런 용기 있는 태도에 용골대를 비롯한 청나라 장수들과 구왕 다이곤은 찬사를 보내게 되고 결국 인조가 나서서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며 전쟁은 끝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삼겠다는 청나라의 요구대로 소현세자는 청나라로 향한다. 하지만 아무도 세자를 수행할 지원자로 나서지 않자, 박제가의 조상인 박 승지가 스스로 세자를 수행하겠다고 나선다. 박 승지는 청나라에 가서 세자를 잘 수행하는 것은 물론 세자가 명나라와의 전투에 참여하러 전장에 가고 나면 봉림대군을 극진히 보필하여 두 사람의 신임을 한몸에 받게 된다.
소현세자는 자신은 볼모가 아니라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배우러 간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도 당당하게 함으로써 청나라 장수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청나라와 명나라의 전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많은 전공을 세운다. 세자는 스스로 전투에 참여해서 보고 들은 결과, 민심이 이미 청나라 편으로 기울었으며 중원을 제패할 청나라 편을 드는 것이 조선의 앞날에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세자의 이런 행동들이 조선으로 전해지면 인조와 중신들은 오랑캐와 한 편이 되었다고 세자를 못마땅해 한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장군이 되어 있는 고려인 황보장군을 만나서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우리 영토의 광활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또 아담 샬 신부를 만나 이제껏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고 자신의 통치 이념을 세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자에게 매료된 구왕 다이곤과 용골대의 도움을 받아 나선정벌을 통해서 조선이 요동을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열고 그 약속을 받는다. 소현세자는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모든 것을 기록한 내용을 봉림대군에게 남겨 놓고 환국한다.
청나라에서 환국을 한 세자에게 오랑캐와 손을 잡았다는 이유를 들어 세자를 역모로 몰아갔다. 반상이 타파되면 자신들의 자리를 잃어버릴 것을 염려한 김자점을 비롯한 공서파 서인들이 인조와 세자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었다. 김자점은 소현세자가 오랜 청나라 생활 때문에 조선 내에는 이렇다 할 기반이 없는 것을 잘 아는 터이라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왕으로 만들기 위해 접근하지만 소현세자가 거절한다. 결국 소현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한 김자점의 간교에 의해 소현세자는 독살당하고 만다.
소현세자가 독살 당하자 청나라는 서둘러서 봉림대군을 환국시킨다. 봉림대군이 환국하자 조선 조정은 석철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서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하지만 세자가 된 봉림대군은 자신의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들의 죽음을 가슴아파하면서 복수를 벼른다. 결국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를 하자 효종은 제일 먼저 김자점 일당을 제거한다. 그리고 송시열과 불만을 품고 낙향했던 송준길 등을 중용하는 것은 물론 이완을 중용해서 북벌의 기치를 올리기 시작한다. 효종의 북벌은 소현세자와 구왕 다이곤, 용골대가 약조해 놓은 나선정벌을 이용한 요동의 실질적인 지배를 통한 영토수복이 그 골자로, 요동수복을 위해서 군사력을 증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는 양반 사대부들에 막혀 일을 그르치게 된다. 결국 효종은 옛 스승인 고산 윤선도의 입궐을 원하지만 윤선도는 자신의 입궐이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조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염려해 거절한다. 윤선도가 입궐하지 않은 조선 조정은 송시열 독주가 되고 결국 원칙에만 의존하는 송시열의 북벌론으로 인해 북벌의 일은 요원해지며 효종은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유형원을 통해 토지제도는 물론 조세제도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법 등을 담은 ??반계수록??을 저술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이완을 통해 군사력을 증강한다. 하지만 북벌의 좋은 기회가 다가와도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 결국 두 번의 나선정벌군을 통해 요동을 수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만 안타깝게 놓치게 된다. 그렇게 기회를 놓친 효종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여위어만 가다 결국 즉위 십 년 만에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효종 역시 형 소현세자가 했던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을 한 권의 책으로 남겼고 그것을 박 승지에게 전하면서 훗날 성군이 나와서 북벌을 이룰 수 있을 때 형 소현세자의 비서와 함께 전해줄 것을 당부한다.
두 권의 비서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비서는 박 승지의 가문에서 보관을 해 오다가 박제가의 손에 전해졌고 박제가는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 이산이, 아버지 사도세자가 북벌의 한을 가슴에 품고 죽을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 비서를 박지원을 통해 세손에게 전한다. 결국 그 비서는 물론 비서에 수록된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을 섭렵한 정조는 서얼들을 중용하는 등 반상타파의 시작을 알린다. 또 실학자들을 대거 중용해서 실사구시의 정치를 할 것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잃어버린 역사 찾기에 나서서 유득공으로 하여금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그 서문에 요동이 우리 땅임을 명기하도록 한다. 하지만 노론의 벽을 넘지 못한 정조 역시 선대왕 효종이 그랬던 것처럼 알 수 없는 병으로 야위어 죽어가고 만다. 하지만 요동수복의 꿈이 정조의 죽음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명확하게 정리한 우리 영토인 요동과 그 요동을 찾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은 소현세자와 효종의 기록들이 비서로 전해지면서 요동수복의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