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직감했다. 비록 손은 거친 황야에 시달려 죽죽 갈라지고 터져서 상처투성이지만, 한 번도 물맛을 본 적이 없었을 지저분한 작업복과, 남발한 회색빛 머리칼 속에 마른 검불이 틈틈이 박히고, 필터가 타들어갈 정도로 독한 담배를 연신 피워대지만, 그는 바람의 강약과 습한 정도에 따라 말과 양들이 그 해 먹어치울 풀의 성장점을 정확히 짐작할 수 있으며, 한겨울 북풍의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말의 가벼운 신음이 두터운 천막의 올올을 헤집고 들어오는 미세한 소리도 끄집어 낼 수 있는 예민한 청각과, 8월의 아침 일찍 일어나 겔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서, 누런 황토를 빽빽이 덮고 있는 이슬 먹은 풀의 날선 눈초리만 보아도 곧 밀려 올 가을의 메마른 바람과 겨울의 칼날 같은 눈의 깊이까지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들은 그렇게 가축의 커다란 눈빛에 잠기며 대초원의 밀밀하게 다가오는 바람의 틈에서 살아갈 자연의 적자가 분명했다.---'시간의 저편' 중에서
소설을 잘 읽었다. 여기 쓰이는 ‘잘’은 ‘싹’, ‘재미있게’, ‘탈 없이’ 등에 다 걸리는 뜻이다. 그러나 미처 덜 읽힌 한 편, ?시간의 저 편?은 이 소설집의 과잉으로 남아 있다. 이 소설에는 몽골의 대초원이 배경으로 제시된다. 독자의 감각 속에 시원하고 푸른 통감각을 열어놓는 소설이다. 목마름과 아랫배 통증을 호소하던 ‘나’가 ‘시간의 저편에서 태고의 지표를 울리면서 다가오는 원시의 음향이 거대한 날개로 광막한 허공을 수만 갈래로 찢으면서 태양의 반대편으로 밀려가는’ 드라마를 겪으면서 배변하는 일은 그에게 ‘통쾌감’의 극치를 선물한다. 통변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없다면 소설의 이 장면을 통변으로 이름지어야 하리라. 박문구 소설의 인물들이 공통적 유전자인 현실에 대한 소화불량이 일거에 해소되는 순간이다. ‘시간의 저 편’이 아니라, 작가는 소설의 저 편을 응시한다. 언어 이전, 현실 이전부터 존재하는 야생적 사유에 대한 갈망은 소설 ‘너머’를 갈망한다. 향유고래는 작가가 지향하는 야생적 사유의 매개물이었다. 작가는 언어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허구도 손 대지 못한 절대적 야생의 세계를 꿈 꾼다. 소설가가 동경하는 ‘시간의 저 편’은 몽골 대초원이 의미하는 초월적 의미가 될 것이다. 그것을 나는 박문구 ‘소설의 저 편’이라 명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