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마 터치, 크레마원 기본뷰어 이용불가
이 상품은 구매 후 지원 기기에서 예스24 eBook앱 설치 후 바로 이용 가능한 상품입니다.
책머리에 집착을 끊어야 행복해진다
1부 집착과 욕심을 버려라 2부 너가 바로 부처다 3부 ‘내려놓음’으로부터 행복이 있다 4부 항상 중도(中道)의 마음을 가져라 5부 불법(佛法)의 이치를 깨달아라 |
저월서
관심작가 알림신청월서의 다른 상품
한국 조계종 승단(僧團)의 대표적인 율사(律師)
월서 스님(대종사)이 산사에서 띄우는 편지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 삶에 있어 최상의 가치인 행복을 얻기 위해 우리들은 절치부심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 잡으려고 하면 도망을 가는 것이 행복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추구하는 그 행복이란 것도 마음 안에 있다. 한국 조계종 호계원장을 역임하고 금오 사상연구소 소장이며 승단의 대표적인 율사이신 월서 스님이 산문에서 띄우는 이 편지들은 인간이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 해답이 따뜻한 글로써 풀어져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비우고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월서 스님의 이 편지들은 세속의 사람들에게 수많은 감동을 던져 준다. 행복을 찾아가는 방법에 대한 제시 월서 스님의 글들을 읽으면 세속의 찌든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산사에서 듣는 풍경소리, 바람 서걱 이는 소리, 목탁 소리, 법고 소리가 사람의 귀를 맑게 하듯 월서 스님이 던지는 말씀들은 한결 같이 맑은 부처님의 법문이다. 이 책은 그동안 월서 스님이 불교신문을 통해 연재 했던 글과 틈틈이 산문에서 쓴 글들을 모아 펴낸 글들이다. 사이사이에 약방의 감초처럼 실려있는 사진작가 장명확 씨의 사진들이 글의 품격을 더욱 높이고 있다. 월서 스님이 이 책을 펴낸 것은 그가 50여 년 동안 절밥을 먹으며 느꼈던 마음의 진솔한 고백들인데 한결 같이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을 깨우쳐 주는 주옥같은 법문들이다. 월서스님이 평소에 강조한 것은 계율(戒律)이다. 계율은 비단 승속에 있는 사람만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속가에 사는 사람들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러한 계율을 지키지 않고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행복이란 ‘버리고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찾아온다는 것을 이 책속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우리가 추구해야할 대상이 아니며 다만 ‘비우고 내려놓음’으로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귀결점이 바로 행복임을 전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강조하신 방하착(放下着)이다. 행복은 자신의 삶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길 줄 하는 마음을 찾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암울하고 슬프며 후회와 불만으로 가득한 삶이 되기 쉽다. 이것은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누구나 깨달아야 할 하나의 진리이다. 부처는 바로 내 곁에 있는 가족 그들이 편안해야 행복. 가족 간에도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한다면 그 집안은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은 손바닥과 손등사이이다. 만약 거리에서 자동차 한대가 교통법규를 안 지킨다면 도로는 순식간에 엉망이 된다. 그걸 우리는 교통지옥이라고 한다. 우리는 결코 지옥을 만들 필요가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어느 날 내가 거쳐하고 있는 정릉 봉국사에 웬 여자 한 분이 찾아 와서 뜬금없이 이렇게 물어 왔다. “스님, 절에서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자네, 왜 절에 오는가.” “그야 뭐 부처님 만나러 오는데요.” “너의 집에도 부처가 있는데 왜 여기를 와. 아직 자네는 때를 씻지 못했군.” “우리 집에 부처가 있다니요.” “남편과 아이들 있어.” “네.” “그들이 바로 부처야. 그러니 그 가족들을 잘 모셔야 해. 그리고 자주 때를 벗겨.” “때라니요.” “허허. 육신에 묻은 때를 벗기는 곳이 목욕탕이라면 마음의 때를 벗기는 곳이 절이지.” 우리의 곁에 있는 사람을 지키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 이 사회는 지금 알수 없는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다. 끊임없는 유괴와 강간, 살인 등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든 부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또한 내 곁에 있는 부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월서 스님이 산문에서 띄우는 이 편지들의 주제는 부처님을 믿고 따르라는 말이 아니다. 탐욕과 화냄, 어리석음을 지우고 바로 내 마음속에 든 부처를 찾으라는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가족이 모두 부처임을 깨닫는다면 어찌 그들에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음의 행복을 얻는 것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윤회가 아니라 그 윤회로 부처 벗어나 얻는 마음의 해탈이다. 그럼 해탈이란 무엇인가. 모든 탐심, 어리석음, 화냄조차 모두 놓아버리는 그 마음이 바로 행복이며 해탈이다. 인간에게 있어 윤회란 하나의 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이것은 곧 불연소된 삶을 뜻한다. 다음 생에도 연속적인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끊어 내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그러나 세속의 우리들이 찾고자 하는 해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마음의 행복’을 찾는 데에 있다. 행복이란 재산을 많이 갖고 명예가 높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행복이며 해탈이다. 재가불자에게 계율을 지키는 것은 행복의 원천 재가불자에게 있어 계율은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할 기본 도리이다. 부부로서, 자녀로서, 부모로서 자신의 처지에서 지켜야할 도리를 지키는 것이 계율이다. 가장은 가장으로서 해야 할 기본 도리를 지키고 주부는 주부로서, 자녀는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 한다면 그 가정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제 도리를 다하지 않고 일탈을 하게 되면 그것이 몰고 오는 파장으로 인해 가정에는 커다란 문제가 생기게 된다. 통계를 보니 1년에 1만3천명이나 자살을 하고 이 가운데 가정의 파탄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이 35%나 된다고 한다. 각자 자신의 도리만 잘 지킨다면 큰 문제가 없을 텐데 말이다. 계율이란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행복 “부처님께서는 불법이 망하는 것은 오직 사자의 몸에서 벌레가 나와 몸을 뜯어 먹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하셨다. 사자는 짐승의 왕이라 설혹 사자가 늙어서 죽더라도 다른 짐승들이 사자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오직 사자의 몸에서 생겨난 벌레들만이 뜯어먹을 수 있을 뿐이다. 불법도 이와 같아서 이교도나 외부의 침입에 의해서 불법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오직 파계불자에 의해 망해질 것이라고 『범망경』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불자는 물론이며 국민들 모두가 종교인들에게 가혹할 만큼 요구하는 것은 도덕성, 청정성이다. 조계종에는 1만2천여 명의 승려가 있는데 이 중에는 뼈를 깎는 수행을 하며 계율을 엄하게 지키는 스님들이 많이 있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적당하게 막행막식(莫行莫食)하는 스님도 있다. 물론 이런 스님들은 일부이지만 그런 일부의 행동으로 인해 마치 전체가 다 그런 양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서산 대사가 쓴 선가귀감을 보면 ‘음란한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면서 견성하겠다는 것은 모래를 찌어서 밥을 짓겠다는 것과 같고 살생하면 참선, 견성하겠다는 것은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다. 남의 물건에 욕심을 내고 훔치면서 참선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고 거짓말하며 참선하는 것은 냄새나는 분뇨를 가지고 탑을 만든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계율을 파괴하고 산란한 마음으로는 아무리 정진해도 수행의 목적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조계의 물로 홍련을 적시랴’ 계율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 주는 옛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 중국 당나라 때 태전 선사라는 덕 높은 스님이 있었다. 당시 태전 선사는 축융산에서 수행을 하였는데 그 스님에 대한 소문이 인근에 자자했다. 마침 그 지역에 태수가 새로 부임했는데 태수는 불교를 박해하는 사람이었다. 이 태수는 태전 선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그 고을에서 가장 미모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홍련이라는 기생을 불러서는 “3일 안에 태전 선사를 파계시키라”고 명령하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관리의 협박에 홍련은 하는 수 없이 곱게 몸단장을 하고는 늦은 밤 축융산으로 태전 선사를 찾아갔다. 홍련은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었다”며 하룻밤만 묵어가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하는 수없이 홍련을 방에 들인 태전 선사는 홍련에게 아랫목을 내어주고는 자신은 윗목에 앉아 묵묵히 벽만 바라보며 참선에 들었다. 홍련이 아무리 교태를 부리고 스님을 유혹해도 태전 선사는 그저 벽만 바라볼 뿐 눈길 한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를 3일이 지나자 마침내 홍련이 눈물을 흘리며 태전 선사께 자초지종을 알렸다. 홍련은 “이제 저는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속 내용을 알게 된 태전 선사가 홍련에게 치마폭을 펼치라하여 그 위에 게송을 하나 적어주었다. 그것이 바로 ‘조계의 깨끗한 물로 어찌 홍련을 적셔랴’였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생명이다. 계율이라는 것은 한 순간 놓아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다. 수행자가 집착과 번뇌에 얽매이면 파계를 하게 된다. 계율이란 질서이다. 질서는 그것을 지키면 편안하다. 그런데 한 생각 잘못 일으켜서 계율을 파괴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생각을 놓아버리고 집착하지 않으면 되는데 업이 두텁게 쌓여 있으면 그렇게 되질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