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대표적 역사 인물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국의 위인에 대해 얘기할 때면 반드시 등장하는 분이기도 하다. 선생의 삶은 예의와 충절을 목숨보다 중시한 조선조 성리학이 사표(師表)로 삼기에 충분했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도 그를 높여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시조(始祖)’라고 칭송하였다. 성리학적 사고가 현존하는 한국 사회에서 선생은 명실공이 한국 성리학의 종조(宗祖)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간 선생에 대한 연구는 문·사·철 각 방향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포은학회’의 설립[2007]과 함께 본격적이면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등장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생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체로 그의 성리학적 철학 사상과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문학 부분에 있어서도 ‘도본문말(道本文末)’의 문학관을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감이 없지 않다. 자연 선생의 문학 전반에 걸친 개인적인 표현 욕구에 대한 조명은 지속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고 있다. 본고는 포은 선생의 해외 체험 중 명나라 사행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포은 선생은 당대 최고의 국제 외교 전문가였다. 선생은 ‘고려 말’과 ‘원명 교체기’라고 하는 동아시아의 급박한 상황을 탁월한 국제 감각으로 읽어내고 실용적인 외교 노선을 통해 국가에 기여하고자 했었다. 선생의 명나라 사행길은 약 1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3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에 걸쳐 인생의 황금기와 함께 했던 명나라 사행은 포은 선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실제 [포은선생문집]에도 당시의 발자취가 상당 부분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연구의 범위를 중국 땅으로 넓혀볼 필요가 있다. 명나라를 오가며 지은 작품들은 그 길에 함께 서서 이해할 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것은 분명한 이치다. 또한 선생이 남긴 자취에 대해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었는지도 중요한 관점이 될 것이다. 본고의 목적은 이러한 사행길 답사에 따른 세부적인 계획 수립과 함께 답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무언의 단서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포은학 연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면 그 역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 포은선생 명 사행길의 역사 포은 선생의 명나라 사행길은 총 6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연구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긴 하지만 명나라 사행 중 3차례는 수도인 남경을 방문하였고, 그 중 2차례는 분명 태조를 알현하였다. 나머지 3차례는 모두 요동에서 입국을 거절당해 돌아오고 말았다. 그럼 구체적인 상황을 사행의 성공과 실패로 나누어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