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에 뮤지컬을 보면서 세 가지가 제일 궁금했다. 우선 뮤지컬이란 무엇인가? 혹은 우리는 무엇을 뮤지컬이라 부르는 걸까? 뮤지컬은 오페라인가? 뮤지컬은 연극인가? 아니면 뮤지컬은 그냥 뮤지컬일 뿐인가? 즉 뮤지컬의 정의에 관한 부분이다. 두 번째는 뮤지컬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면 어디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오페라나 연극, 오페레타 등 여타 유사 장르와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뮤지컬의 어떤 특징이 유사 음악극들로부터 뮤지컬을 분리시켰을까? 뮤지컬의 본질적인 특성에 관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가장 뮤지컬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뮤지컬의 형성 배경, 시대 흐름에 따른 변화 과정, 다시 말해 뮤지컬의 역사와 뮤지컬의 정의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뮤지컬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으며, 각 시대마다 어떤 작품이 인기를 끌었는지 등을 살펴보면, 뮤지컬이 지닌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을 듯하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다른 공연장이 커플들의 데이트 코스라면, 「맘마미아」 공연장은 딸을 동반한 엄마들의 계모임 같았다. 그리고 그건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관객들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먼저 주요 스토리가 엄마와 딸의 삶과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고, 서로의 갈등과 반목은 결국 서로에 대한 진실된 이해에 의해 해결된다. (…) 그렇다면 결국 이 작품의 무엇이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 아바의 노래? 그보다는 아스라이 잊혀졌던 엄마의 청춘, 그것의 되돌아옴이 아닐까? --- 「맘마미아」 중에서
바로 프랑스에서 이 작품이 그랬다. 이 작품 이후로 여러 편의 프랑스산 대형 뮤지컬들이 줄줄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런 기록들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이 작품을 사랑한다. 여러분이 바로 전에 읽었던 문장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그렇다. 나는 처음으로 뮤지컬 작품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 「노틀담 드 파리」 중에서
연극 무대가 현실성을 확보해야 한다면, 뮤지컬 무대는 환상성을 잃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이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면, 뮤지컬은 관객을 느끼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작품을 보고 있을 때, 보고 난 후에라도 나를 몽롱한 환상에 빠지게 만드는 작품이 가장 뮤지컬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생기는 또 다른 의문점.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현실과 관련되어 있으면 덜 뮤지컬적인가? 그렇지는 않다. 「캐츠」의 경우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다양한 고양이들의 다양한 세상살이지만,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다만 A를 A라고 보여주는 방식이 문제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 A가 아닌데, 내가 본 것이 A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 그게 있어야 무대 위의 환상이 관객석으로 내려와 현실과 만날 수 있다. 꿈을 꾸게 만든다는 것과 허무맹랑함은 전혀 다르다. 이야기가 탄탄하지 못하면, 관객은 절대 제대로 된 꿈을 꿀 수가 없다. --- 「캣츠」 중에서
일부 오페라 애호가들에게 뮤지컬이 오페라의 상속자란 표현은 마뜩치 않을 수 있다. 대중음악보다 클래식이 더 고급스럽고 우월한 음악이라고 여겨지듯, 오페라도 뮤지컬에 대해 일정부분 우월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도 자기를 따라하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듯이, 오페라 입장에서는 뮤지컬이 자신과 너무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페라도 초기엔 가면극, 종교극 등에 밀려 궁정행사의 일부로만 취급되다가 몇 세기를 거쳐 대중적인 문화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 결국 어느 장르가 어느 장르보다 더 우세하고, 더 고급스럽고, 더 고귀하다고 할 수 없지 않듯애초에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의 질이 문제인 것이다. 오페라든 있기 때문든 있연극이든 얼마만큼 더 완성도 있게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회T있는있어서 추상화 있구상화 있정물화 중 어느 것이 더 우세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몬드리안의 추상화만큼 세잔의 정물화, 렘브란트의 인물화도 회화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며, 누구의 작품이 더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 「오페라의 유령」 중에서
하지만 조승우가 무대에 서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박수가 배우 조승우보다 「지킬 앤 하이드」라는 작품을 향하는 느낌이다. 언뜻 보면 ‘네? 내가 보기엔 거의 조승우 콘서트 같던데요?’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가 않다. 왜냐고? 무대 위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인물을 통해 작품의 에센스만 무대에 남고, 그걸 이루어낸 배우의 모습은 사라진다. 그래서 언뜻 보면 관객의 박수가 배우 조승우를 향한 것 같지만, 사실은 배우 조승우를 통과해서 그가 불러일으킨 작품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 순간, 관객과 배우 모두 작품의 에너지 안에서 하나가 된다. 아니, 하나됨을 강렬하게 느낀다. 이런 맥락에서, 조승우는 관객에게 작품을 이해시키는 배우라기보다는 작품을 느끼게 하는 배우라 할 수 있다. --- 「지킬 앤 하이드」 중에서
누보 시르크는 ‘새로운 서커스’를 지칭하는 프랑스어로서,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가 흔히 아는 고전적인 형태의 서커스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그와는 확연히 차별된다. 언뜻 보면 서커스에서 뻗어 나온 누보 시르크와 연극과 오페라에서 뻗어 나온 뮤지컬은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굳이 둘의 관계를 얘기하자면, 역사적인 면에서 뮤지컬이 온전히 뮤지컬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없애려 했던 요소가 바로 서커스였을 만큼 ‘좋은’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표적인 누보 시르크 극단 중 하나인 캐나다의 ‘태양 서커스Cirque du Soleil’의 작품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두 장르 모두 노래와 춤을 중심으로 작품이 펼쳐진다는 핵심적인 공통점이 있다. 음악만 있으면 무엇이든 뮤지컬이 될 수 있다던 해머스타인의 말을 적용시켜보면, 넓은 의미에서 누보 시르크도 뮤지컬로 편입시킬 수 있지 않을까?
--- 「뮤지컬의 친구, 누보 시르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