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누군가 내게 해줬어야 할 말들을 곧잘 해 주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뭐랬냐면, '그래, 좋아.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누군가를 맘껏 미워할 수 있는 나이가 될거야. 하지만 아직은 안돼. 누군가를 힘껏 좋아해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미워할수 없어'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어쨌든 내 맘에 쏙 드는 말이었다. 누가 내게 그렇게 말해주길 오래도록 기다려온 기분이 들었다.
--- p.339-340
순지는 이제 아무 소용이 없게 된, 전에는 아늑한 주거공간과 소중한 재산을 표징하였으나 이제는 단지 하나의 의미 없는 물체일 뿐인 손바닥 위의 작은 쇠붙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두 다리가 스르르 맥이 풀리고 떨려 순지는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며 세상이 늪지가 가라앉듯 아득히 물러앉는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없어. 이럴 수는 없어.
새삼스럽게 절망스런 현실을 확인한 순지는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아우성 같은 비명을 삼켰다. 상실감이 너무도 깊어서 제 자신이 마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져 내버려진 마른 초목같이 느껴졌다.
그 동안 이 스물 몇 평의 공간 안에 그처럼 안온하게 존재하던 삶은 송두리째 헛된 가상이었던 것인가. 이곳에서 먹고 자고 즐기고 슬퍼하며 영위하던 나날들이 기실은 실체가 없는 순간순간의 허상들에 불과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라도 다만 그 실체의 조각이라도 쥐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살뜰하게 축적해 온 지난 삶의 궤적을 철저히 차단한, 그래서 그 흔적조차 만질 수 없는 푸른색 두꺼운 철문 앞에서 순지는 허탈하고 또 허탈하였다. 아이라도 있었다면, 곁에서 똘망한 눈빛으로 엄마의 고통을 함께 나눌 따뜻한 체온의 살붙이라도 데리고 있었다면 이 터에서 이룬 지난 삶이 이처럼 헛된 자취 같지는 않을 것을, 순지는 가슴 속에 그늘처러 자리잡고 있던, 자신이 놓아버린 숱한 아이들의 영상을 느닷없이 떠올렸고, 그와 함께 절절한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 pp.191-192
남편과 못살겠다고, 부디 매맞지 않고 조용히 이혼할 수 있는 길을 알려 달라고 여자는 손수건을 꼬깃거리며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 여자가 준비해 온 편지를 읽는다.
'여보, 베발 술 좀 고만 드시고 우리 고생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착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희망을 갖고 사십시다. 사랑하는 당신 아내가'
그 대목에서 여자는 목이 맨다. 사랑한다니? 비장하기가, 폭우 속에서 발표하는 역사적 독트린 같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여자들은 왜 울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마취를 거는 순간, 고양된 순교자적 희생 정신 때문일 거다. 써금써금하다 못해 삼출물이 누렇게 흘러나오면서도 무슨 인사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끝에 사랑한다는 토를 다는 부부를 보면 웃음이 난다. 사랑한다는 말이 정말 주접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지겨워서, L은 젖은 걸레를 깔고 앉은 기분이다.
--- p.65
기묘하게 공허해 보였다. 밤과 낮 사이의 망각의 벽이 뒤로 물러서고 젖빛 아침이 오면, 호객을 위한 현숙막과 간판들은 글자를 드러내고 가게들은 물건을 아케이드 앞에 줄줄 겹쳐 내놓겠지만 그 시각엔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좀 채로 실감할 수 없었다. 시간은 마치 다른 세계 속으로 잠적한 것 같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흐름이 박탈된 광물질의 세계로.
---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