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담당하게 된 제품은 이름도 생소한 미니프린터Mini Printers였다. 미니프린터는 말 그대로 작은 사이즈의 프린터로 가게나 식당에서 영수증을 인쇄하거나 바코드를 인쇄하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산업용 프린터다. 가게의 매상과 관련된 제품의 특성상 높은 품질을 요구받았고, 일본산 제품이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업체로는 최초로 미니프린터를 개발한 삼성전기는 시계와 초정밀 제품으로 유명한 엡손Epson, 시티즌Citizen, 스타Star Micronics 같은 일제 브랜드가 독과점하던 세계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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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사원은 매 순간 크고 작은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한다. 따라서 어느 부서에서보다 직관력과 통찰력을 요구받는 곳이 영업부서다. 다른 실무 감각은 노력을 통해서 충분히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영업 감각은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그 영업 감각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마케팅 서적들을 미친 듯이 읽어댔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거시적인 얘기나 원론적인 얘기들만 늘어놓을 뿐 현장에서 매일 마주하게 되는 복잡미묘한 상황에 적용할 만한 내용은 찾기 어려웠다. 그때 접하게 된 것이 역사서였다. 역사서, 구체적으로 말해 전쟁사戰爭史가 내게 길을 보여줬다. 개별적인 전투에서 펼쳐진 구체적인 상황들은 영업 현장에 대입해도 손색이 없는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가 돼줬다. 여러 가지 고려 사항이 얽혀 있는 전시 상황에서 그에 맞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지휘관들의 모습을 통해 나의 현장에 통용될 수 있는 현실적 지침을 발견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 차고 넘치는 전쟁 기록들 속에서 정보전, 심리전, 기만술 등 경쟁사를 상대할 때 활용할 만한 창의적인 마케팅 전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전면전, 게릴라전, 우회전술과 기습공격의 사례를 통해 약자弱子의 입장에서 시장에 침투하는 영업 전술을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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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읽은 전쟁사 관련 서적이 어느덧 책장을 가득 채웠고 내겐 의사결정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으며 스스로 영업 감각이라는 걸 체득했음을 느꼈다. 이는 비단 느낌이 아니라 매출의 증가로 뒷받침됐다.
(들어가며: 나는 세계 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
알토의 전시품들은 우리 회사 제품들의 데드카피Dead Copy, 즉 복제품이었다. 그것도 자세히 보지 않는 한 두 제품의 차이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복제품이었다. 게다가 제품에 붙어 있는 가격은 빅솔론 제품보다 무려 20퍼센트나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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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떠오른 것이 이사부 장군의 나무사자 전술이었다. 빅솔론의 제품을 모방했으니 빅솔론이 어떤 회사인지 알 것이고 당연히 삼성이 모기업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삼성이 가진 파워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점을 이용해 그들의 두려움을 자극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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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사자 전술을 활용해 알토의 두려움을 야기하고 빠르게 밀어붙여 항복을 받아낼 계획을 세웠다. 나는 먼저 알토의 경영진에게 보낼 긴 문서를 작성했다. 빅솔론은 삼성에서 분사한 기업이라는 설명과 함께 알토가 출시한 제품이 빅솔론이 삼성 시절부터 보유하고 있던 의장등록특허권을 침해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법적 조치에 앞서 알토가 스스로 특허를 침해한 디자인을 변경하길 원하며,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알토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경고문을 넣었다. 이와 함께 전시회에서 촬영한 복제품 사진과 빅솔론 제품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침해된 의장등록디자인을 세부 항목별로 상세히 지적했다. 문서는 소장訴狀 양식에 준해서 작성했고 내 이름 밑에는 영업사원 대신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넣었으며 소속 또한 해외영업팀이 아닌 법무팀으로 기재했다. 일종의 꼼수를 부린 셈이다. 내가 가장 유념했던 부분은 이 문서가 실제 변호사가 작성한 법률 문서처럼 보이도록 형식과 구성을 갖추는 한편, 몇 가지 기술적 장치를 통해 이 문서를 본 알토의 경영진이 빅솔론이 아닌 삼성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2.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움을 이용해라 -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복기)
적군을 성 밖으로 끌어내려는 유인전술이 모두 실패하자 몽골군은 전투를 중단하고 조건부로 화친을 제안한다. 서하에겐 뜻밖의 소식이었다. 몽골은 서하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요구하는 공물을 주면 군대를 물려 철수할 것이나 만약 공물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인근의 도시들을 약탈하고 살육하면서 서하를 초토화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그들이 요구한 공물은 뜻밖에도 살아 있는 고양이 1,000마리와 제비 1만 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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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군은 성벽 위에서 사로잡은 고양이와 제비를 던져주며 미개한 오랑캐들을 한껏 비웃었다. 그리고 약속한 공물을 제공했으니 이제 철군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몽골 포로는 서하군을 기만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잡힌 것이고 고양이와 제비는 먹기 위해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몽골군은 넘겨받은 고양이와 제비의 꼬리에 기름 먹인 솜을 매달았다. 그리고 불을 붙여 일제히 풀어놓았다. 꼬리에 불이 붙은 동물들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성벽을 넘어 원래 살던 거처로 돌아갔다. 동시에 수백 군데에서 불길이 치솟자 서하의 성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자 서하군은 불을 끄기 위해 우왕좌왕했고 지휘관은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것이 바로 몽골군이 노리던 바였다.
(4. 유연하게 생각하라 - 칭기즈칸, 제비와 고양이를 이용하다)
“토마스, 당신네 회사에서 작년부터 수입하기 시작한 바코드 스캐너가 한국 제품이지요? 그 제품 어때요?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만족할 만한가요? 우리도 쓸 만한 바코드 스캐너를 찾고 있는데 평가가 괜찮으면 우리도 수입을 해볼까 해서요.”
“글쎄요. 제품의 성능이나 품질은 대체로 만족합니다만 사업을 하는 스타일이 영 KFC네요.”
“그래요? 그럼 좀 더 지켜봐야겠네요. 아무리 제품이 좋아도 KFC와는 거래하고 싶지 않아요. 다른 제품을 찾아봐야겠군요.”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맥락상 KFC가 하얀 양복을 입은 할아버지를 마스코트로 하는 켄터키프라이드치킨Kentucky Fried Chicken을 의미하는 게 아니란 점은 확실했다. 한참 얘기를 듣다 불쑥 그들에게 KFC가 뭔지 물었다. 질문을 받은 거래선 사장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망설임 끝에 그가 들려준 KFC의 의미는 충격적이었다.
“한국인으로서 듣기 기분 나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말하는 KFC는 Korean Fucking Company’의 약자입니다. 사업 초기에는 열정을 불태우다가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면 초심을 잃어버리는 한국 기업들을 가리키는 말이죠. 전자제품시장의 특성상 한국 기업들과 거래할 일이 많은데, 시간이 흐를수록 태도가 돌변하는 회사들을 겪다 보니 우리끼리 만들어낸 말입니다. 당신 회사는 여기에는 해당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7. 초심을 잃으면 무너진다 - 스파르타쿠스와 노예 군단)
둘리틀 폭격대를 실은 항공모함과 호위 전단이 일본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일본 감시선과 마주친 것이다. 시간을 끌었다가는 폭격 작전 자체가 노출될 수 있었다. 둘리틀 중령은 모든 승조원들에게 즉시 이륙할 것을 명령했다. 애초 출격 예상 지점은 일본 동쪽 500마일 해상이었으나 실제 이륙 지점은 그보다 훨씬 먼 850마일 해상이었다. 비행거리가 늘어나는 바람에 중국까지 날아갈 만큼의 연료가 확보될지 의문이었지만 둘리틀 중령과 그의 팀원들은 유사시 바다에 불시착해 고무보트를 타고 탈출하더라도 반드시 도쿄를 폭격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일본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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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의 미군 폭격기와 80명의 승조원들은 일본의 심장부에 비수를 날렸다. 일본은 신의 나라이므로 적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일본인들의 믿음은 황궁에 떨어진 폭탄과 함께 송두리째 날아갔다. 몽골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지켜줬다고 믿은 신풍新風, 카미카제 역시 미군은 막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 군부 역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본토의 영공 방어망이 쉽게 뚫렸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본토 방위를 위해 방어망을 전면 재편해야 하는 부담을 져야 했다.
(14. 급소를 공격하라 - 둘리틀 대령의 도쿄 공습 작전)
길목은 교통의 요지이자 왕래를 위해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으로 길목을 장악하면 적군을 상대로 효율적인 방어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군의 원활한 보급선을 확보할 수 있다.
비즈니스에서도 이런 전략적 가치를 지닌 길목이 존재한다. 싱가포르나 두바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러시아나 독일, 미국 같은 국가들은 새로운 제품이 처음으로 출시되는 대표적인 시장이자 주변 국가에 파급력을 미치는 거점시장Hub Market이다. 많은 회사들이 이들 국가에 지역 본사Regional H.Q를 설치하거나 특허를 우선 출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변 국가의 수입상이나 유통상들은 거점시장에서 성공한 히트 상품을 자신의 나라에 도입한다. 따라서 이 나라들은 지역적인 관점에서 상품의 정보가 이동하는 길목이라고 볼 수 있다. 제품에 대한 정보가 몰리는 전문 전시회나 무역 포털사이트 역시 다른 의미의 길목으로 볼 수 있다. 정보의 길목Information Portal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거점시장이나 정보의 길목을 통해 시장에 도입되기 직전의 신제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따라서 길목을 선점하는 것이 전투에서 중요한 것처럼 정보가 모이고 이동하는 거점시장과 정보의 길목을 선점하는 것 또한 해외시장을 공략할 때 필히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16. 길목을 선점하라 - 영화 〈300〉과 테르모필레 전투)
이스터 섬에서 벌어진 일들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자원을 소모하는 사람의 숫자가 급증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태계가 수용할 수 있는 적정 규모 이상으로 소비자가 늘어나면 시스템은 붕괴된다. 이스터 섬의 비극은 비단 자연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비즈니스 환경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
적정한 수의 경쟁자가 존재하는 시장에선 모든 제조사들이 만족할 만한 이익을 얻는다. 하지만 공급자의 숫자가 시장의 한계에 도달하거나 이를 초과하는 순간부터 시장의 수용 능력은 붕괴된다.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공격한 것처럼 시장 참여자 간의 과당경쟁이 시작되고 나아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인수합병이 뒤따른다. 살아남으려면 이 상황을 버텨내야 하기에 손익을 따지지 않는 극단적 마케팅이 펼쳐진다. 이른바 레드오션Red Ocean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규모의 경제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중소기업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기업들 역시도 시장의 재편 과정에서 과잉 설비 투자나 가격 폭락으로 인한 고통을 감수하게 된다. 어느 시장이고 수요량보다 공급량이 초과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이런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두 가지다. 강한 체질로 거듭나서 상대방을 잡아먹을 수 있는 힘을 기르거나 먹거리가 남아 있는 새로운 시장을 찾아내는 것이다.
(21. 항상 탈출구를 마련하라 - 이스터 섬은 왜 폐허가 됐을까)
인도│거짓말을 조심하라
쉽지 않은 국가다. 자동차를 살 때 사이드 미러Side Mirrors가 옵션이고 자동차 뒷면에는 ‘Please Horn Me경적을 울려 주세요’스티커가 일상적으로 붙어 있을 만큼 무질서와 가격 파괴가 성행하는 시장이면서 비즈니스 미팅에서는 몇 시간 동안의 마라톤 협의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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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비즈니스 미팅이나 품질 불량으로 인한 대책 회의에 참여한다면 장시간 회의를 예상해야 한다. 인도 거래선과의 사업 경험이 적은 한국 비즈니스맨들은 같은 주제로 두어 시간 대화하고 나면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질려서 ‘그래, 요구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 그만 이야기하자’라는 식으로 미팅을 급히 마무리 짓는 경우도 많다. 쇠뿔도 단숨에 빼야 하는 한국인 정서상 오랫동안 이야기하다 보면 지쳐서 여러 가지를 양보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미팅 전 자신의 논리를 정리한 의견서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더 버티기 힘들다 싶으면 미리 준비한 의견서를 내밀고 내가 말하고 싶은 논점은 다 이야기했고, 자세한 내용은 여기 의견서를 준비했으니 이 자료를 참고로 봐달라고 마무리해도 좋다.
(부록 1 - 완전히 다른, 국가별 비즈니스 스타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