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응?” “소영이한테 말해 봐. 이상한 그 마음들에 관해서.” “아빠, 그건 좀.” “베스트 프렌드잖아. 그런 친구하고는 마음껏 솔직해져도 괜찮아.” 베스트 프렌드. 언젠가 소영이도 장난처럼 내게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그때 난 웃음으로 넘겼지만, 조금 무거웠다. 베스트. 그 말의 무게를 견딜 만큼 나는 충분히 깊지 않은가 보다. 특히 소영이에게는. “넌 아냐?” “베스트 프렌드?” “그래.” “모르겠어, 아빠.” “모르겠다는 건 아님 쪽인데?” “그런 거야?” 자신 없이 되묻고 나니 풀이 죽었다. 소영이에게 미안했다. “지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원래 서로의 마음 분량을 정확히 수평으로 맞추기가 어려운 법이야. 수평을 이루지 못 했다고 해서 미안해하거나 주눅 들 필요는 없어. 그럴 땐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 pp.56~57
나로 말하자면, 거짓말보다 더 나쁜 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벌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 애, 연주 일 때도 그랬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둥둥 먹구름처럼 퍼져서 결국 내 머리 위로 폭우가 쏟아졌다. 어어, 하는 사이 왕따의 적극적인 주동자가 되어 버렸는데도 나는 완강하게 부인하지 못했다. 내게로 밀려드는 도도한 흐름이 어처구니가 없어서였기도 했지만, 죽음을 선택하려 했던 그 애 앞에서 내 변명은 하찮은 핑계로만 느껴져서이기도 했다. 베이비박스 앞에 나타났던 여학생이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뿐. 앞뒤 사연들에 관해서는 하나도 아는 바 없다. 지원이가 넘겨짚었던 생각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설혹 맞다고 해도 지원이에게 그걸 널리 퍼뜨릴 권리는 없는 것이다.
--- p.134
오늘, 아빠의 사과가 나를 따뜻이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결코 네 잘못만은 아니라고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평생 지고 가야 할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굴레를 아빠가 나누어 져 주는 것만 같았다. 어디에서 살건, 이젠 억울함 없이 찬찬히 견뎌 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