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이 마음, 이것을 예수는 ‘가난한 마음’이라 불렀습니다. 텅 빈 이 마음, 이것을 노자는 ‘허(虛)’라 불렀습니다. 텅 빈 이 마음, 이것을 붓다는 ‘공(空)’이라 불렀습니다. 텅 빈 이 마음, 이것을 장자는 ‘심재’ 혹은 ‘좌망(坐忘)’이라 불렀습니다. 예수의 ‘가난한 마음’, 노자의 ‘허’, 붓다의 ‘공’, 장자의 ‘심재’, ‘좌망’ 등 이 모든 것은 다 같은 것입니다.
--- p. 9
이 파충류의 뇌는 철학적으로 말하면 ‘살려고 하는 맹목적 의지’ 같은 것 입니다. 이런 뇌를 가진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생존하려 하는 자이고 자살과는 아무 관련도 없으며 오히려 남을 죽이는 자입니다. 자식을 죽여 암매장한 계모가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남편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그랬다’고 했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파충류의 뇌에서 나온 목소리인 것입니다.
--- p. 50
우리 인간은 일평생 살면서 생각을 단 한번도 멈춰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멈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다채로운 경험도 하고, 나름 책도 많이 보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대화를 나눠보면 그런 인생을 안 산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다양한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도 생각의 너머에 대해서는 아무런 체험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 p. 85
첫째 자아형성, 둘째 자아집착, 셋째 자아함몰 이 세 가지가 인간 영혼 하강의 3단계입니다. 이 하강을 겪으면서 인간의 영혼은 태초의 참 본성을 상실하고 점점 졸아들고, 졸아들어 마침내 자아 하나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물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정신지체아에게는 자아가 그대로 세계입니다. 이 아이에게는 자아를 떠난 객관적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못보고,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아함몰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 p. 116
무한을 잘게 쪼갠 것, 이것이 학(學)입니다. 잘게 쪼갰으니 이제 우리는 이것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학의 효용인 동시에 한계입니다. 잘게 쪼개진 이것은 결코 자연의 참모습, 즉 무한이 아닙니다. 무한을 무한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도(道)입니다. 무한을 유한으로 잘게 쪼개는 것, 이것이 학입니다. 학으로서는 도에 이를 수 없습니다. 파스칼은 도를 찾아다니다 못 찾고 절망해서 죽은 것이고, 피타고라스는 도가 너무 무서워 이를 학으로 대체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서양 수학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 한계입니다.
--- p. 143
문명의 관점은 간혹 진실을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분노는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 그렇지 심리학적으로 볼 때 결코 인격의 붕괴가 아닙니다. 진정한 인격의 붕괴는 공포입니다. 공포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와해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체는 공포를 느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공포 반응을 일으키게 되면 인격의 통일성이 급격히 훼손되고 망가집니다. 아무리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도 한번 공포를 느끼면 그길로 끝입니다. 식은땀이 나고 혀가 얼어붙어 말도 잘 못하는데 뭘 어떻게 해보겠습니까? 바지에 오줌을 쌌는데 그걸로 게임은 끝난 겁니다.
--- p. 244
우리는 땅에 걸려 넘어지지만 역시 땅에 의지하여 일어섭니다. 우리는 마음에 걸려 넘어지지만 역시 마음 안에서 일어섭니다. 쓰러지는곳도 마음 안이고 일어서는 곳도 마음 안입니다. 그러니 언제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늘마음이 들어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심즉도(心則道)’라 불러 보았습니다.
--- p.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