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 떠나는 배에 오르는 날까지 이레 동안 철영은 슬프고 울적한 마음을 술로 달랬다. 낮부터 술에 취해 휑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종일 꼼짝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기도 했다. 무엇이 그토록 슬프고 울적한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내가 살아서 일본으로 갔을 것이라는 확신은 다행이고 또한 불행이었다. 날이 밝아도 철영은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철영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내를 찾든 찾지 못하든 다시 조선 땅을 밟기는 어려우리라. --- pp.90-91
이화는 조선을 떠나던 날을 더듬었다. 아직 한 해도 지나지 않았지만 까마득한 옛날 같았다. 조선 여자들은 갑판 난간에 두 팔을 묶인 채 멀어지는 조선 해안을 보았다. 울먹이는 여자들도 있었다. 왜병들에게 잡히기 전까지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나라로 끌려가는 길이었다. 갈매기들이 배를 쫓아 날다가 해안으로 돌아갔다. 갈매기들이 해안으로 돌아갈 때 이화는 자신이 이제 세상과 작별하고 있음을 알았다. 태어나고 자라고 혼인하고 아이를 낳은 땅이었다. 조선은 이화가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다. --- pp.142-143
히로시와 보낸 날들은 행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욕심을 부리는 것은 화를 키울 뿐이었다. 아시타는 남편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느꼈지만 자족해야 함을 알았다. 불현듯 잊었다고 생각한 조선의 집이 생각났고,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아들 편윤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아시타는 히로시의 손에 어깨를 잡힌 채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것으로 됐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히로시와 아이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됐다. --- pp.220-221
철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지문을 열었을 때 뜰 안의 국화가 시들고 있었다. 국화는 찬바람에 흩어지고 이제 또 하나의 가을이 가고 있었다. 이 낯선 땅에서, 아내를 찾지 못하고 이렇게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것일까. 세월을 따라 젊음이 가고, 세월을 따라 아내의 고운 얼굴도 잊히고 있었다. 이렇게 몇 해를 보내고 나면 아내를 보아도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아내를 만나고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런 착각이 깊어지는 날엔 더욱 깊은 절망과 우울감이 밀려왔다. --- pp.249-250
아시타는 고개를 들고 철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라리 죽이십시오.” “당신은 조선인이오!” “나는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이 두 아이의 어미입니다.” “닥치시오!” “내가 다시 아이들을 잃어야 합니까? 죽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오지 않을 지아비를 기다린 세월을 아시는지요?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오지 않을 지아비를 홀로 기다리는 심정을 아시는지요? 이제 내 어린아이들이 오지 않을 어미를 기다리며 살도록 해야 합니까? 나더러 이 아이들을 버리라고 하실 요량이면 차라리 죽이십시오. 오지 않을 어미를 기다리게 하느니 차라리 죽었다고 알려주는 편이 낫습니다. 죽이십시오. 나와 이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비까지 이 자리에서 모조리 죽여주십시오. 나으리의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