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그비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든 것은 뒤집어진 책장도, 바닥에 마구 쏟아진 책 위를 정신 나간 사람마냥 사지로 기어다니는 구나르 교수도 아니었다. 그것은 복사실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 얼굴을 위로 향한 채 바닥 저편에 드러누워 있는 시신이었다. 트리그비의 위장이 뒤틀렸다. 시신의 두 눈을 덮고 있는 저 헝겊 조각은 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두 손은, 대체 두 손은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된 것일까? --- p.11
“안데하이스 교수님은, 변호사님이야말로 저희가 원하는 자질을 갖춘 분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집요하고, 단호하고, 포기를 모르는 분이라고 하더군요.” 토라는 예전의 은사가 차마 ‘오만하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 p.19
구나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하랄트 건틀립이 역사학과에 지원서를 제출했던 그날을, 그리고 자기 혼자 하랄트의 입학을 반대한 일을 저주하듯 떠올렸다. 그는 하랄트의 지원서를 보자마자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마녀사냥을 주제로 학사논문을 썼다는 걸 확인한 뒤에는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 p.112
후에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좀 말이 안 되는 소리 같기는 하지만, 분명 이렇게 말했던 거 같아요. ‘좋은 꿈꾸라고. 축하는 나중에 하면 되니까. 지옥을 찾아 아이슬란드에 왔는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 지옥을 찾아냈어.’ ” --- p.182
마녀들의 주술행위와 의식에 관한 일화 및 해설은 그야말로 믿기 힘들 정도였다. 마녀의 위력에는 한계가 없는 듯했다. 폭풍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거나 하늘을 날아다니고 남자들을 동물로 변신시켰다. 또 신체의 무기력을 유발하고 남자의 성기가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었다. --- p.266
《마녀의 망치》를 읽은 토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사건의 이해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왜곡되고 자의적으로 변질되는 당시 사법체계에서 개인이 자신을 변론하기란 매우 어렵고 복잡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럼 학생은 어떤 마술을 사용해봤어요?” 토라는 마르타를 약 올리기 위해 덧붙였다. “닭의 목을 자르거나 인형에 바늘을 꽂는 걸 제외하고요.” --- p.279
쏟아지려는 눈물을 토라는 겨우 참아냈다. 아들이 한참 전부터 보내온 신호를 이제야 해독한 것이다. 길피는 시가도 없이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재미없었던 거야. 혼자 침대 위에서 점프하며 늑대처럼 울부짖기나 했으니까…. -394쪽
토라가 조롱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준다고 쳐도 그렇지, 뭐라고? 어차피 버릴 물건들이라니!” 그녀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뭔가를 들어올려 살펴보는 시늉을 했다. “이 발 한 짝은 뭐지? 피 묻은 물건이 너무 많잖아. 그냥 버리지 뭐.” --- p.439
“저 역시, 제가 하랄트와의 관계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너무 늦어버렸고 어떻게든 그 결과를 감당해야겠지요.” 토라는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복수의 저주가 먹혀든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