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같은 다석 유영모의 얼 기독론은 오늘 우리에게 서구 기독교 교리에 대한 안일한 모방적 적용을 피하게 하며 자기 전통에 대한 성실한 참여를 통해 기독교의 자기 변혁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평화를 이룰 수 없으며, 종교 간의 평화는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성사되지 않는다는 세계 윤리 구상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얼 기독론이 기독교와 동양 종교들 간의 지평융합을 위한 창조적 노력의 결실인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전 지전 지구적 위기 상황 하에서 국가/민족/종교 그리고 제반 이데올로기를 넘어 세계 윤리 구상을 정언적 명령으로 요청받는 시점에서, 얼 기독론이 갖는 초월과 내재를 아우르는 생명 신학적 요소는 역사 현실 속에서 보편적 구속력을 지닐 수 있다.---“동서 신학 사조에서 본 다석의 얼 기독론”, p.89
유영모와 김흥호는 한글 속에서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말했다. 우주적 생명의 본질이 본래 있음에 있지 않고 비움에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비움은 철저하게 '아(我)'의 흔적을 버릴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불살라야 한다는 것이다. 비움 속에서만 인간은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며 그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효는 없이 계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는 인간 '살음'의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이유가 된다. 비움은 또한 우주생명의 화육을 돕는 생명 원리의 길이기도 하다.---“다석 유영모가 본 한글 속의 기독교”, p. 127
동학과 다석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는 동서를 아우르는 생명사상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천부경』의 ‘일’과 ‘삼’의 구조에서 보듯 본래 우주는 ‘한 생명’이었다. 우주만물은 절대 생명인 ‘하나’의 화현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동학은 인간이 절대생명인 ‘한울’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의 자각을 말했고 다석은 하나님을 자신의 밑둥(속알)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참나가 우주를 포괄하는 전체임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자신의 참나를 찾음으로써 근원적 하나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천부경을 통해서 본 동학과 다석의 기독교 이해”, p. 162
이들(다석학파)은 한결같이 정통 기독교의 대속사상을 불이적 구원론, 곧 수행론의 틀로 바꿔 이해했다. ... 다석이 스승 기독론을 전제로 '없이 계신 이'(얼, 바탈)와 하나된 길을 제시했다면 함석헌의 경우 ‘씨알 예수’는 집단적 특성을 담보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인류 전체의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다석의 스승 기독론에 비해 대승적 기독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에 반해 김흥호는 예수를 ‘실존’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실존은 본질에 있어서 선생(스승)의 다른 표현이다. 선생을 좇아 길을 가다 스스로 길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 했다. 결국 바탈(얼)이 씨알이 되고 그것이 실존으로 언표되기는 했으나 다석학파의 독특한 구원관을 고지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기독교 이해는 일관된 원리를 따른다.---“다석과 다석학파의 탈기독교적 기독교”, p. 200
다석은 역사적으로 태어난 예수를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것을 거부했다. 육신을 입은 이상 예수의 몸 역시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늘 아버지(바탈)의 뜻을 따랐기에 예수는 하느님이고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유교식 이해이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늘로부터 '바탈'을 품수한 인간이 지난한 수행을 통해 삼독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예수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다석의 생각이다.---“다산과 탁사를 넘어 다석에게로”, p. 252
‘없이 있는’ 하나(빈탕)가 하느님이고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바탈 속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없이 사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하다. 다석은 종종 성서가 말하는 ‘거룩’을 ‘깨끗’으로 이해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성서 말씀 때문이었다.... 다석에게 더러움은 '덜 없음'이었다. 빈탕한 데 맞혀 놀지 못한 상태가 바로 덜없음, 곧 더러움인 것이다. ... 그렇기에 없이 계신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덜’ 없는 존재가 돼서는 안 된다. 교회 역시도 자신의 '덜 없음'을 자각하고 깨끗해져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 평화생태신학이 추구하는 해방적 교회의 실상이 담겨 있다.---“개신교적 생태신학의 특성과 다석 신학 속의 생명의식”, p. 287
그는 여느 서구신학자들보다 철저한 생태주의자인 것이다. 인간의 자기완성, 곧 절대생명에로의 길은 따라서 ‘있음’이 아닌 ‘없음’에 걸맞게 사는 데 있다. 때문에 다석은 우리 인간이 '빈탕'한 데 맞춰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몬(物)에 애시당초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다석이 자신의 삶으로서 제시한 것이 ‘일좌식(一座食) 일언인(一言仁)’이었다. ... 이것은 하루 한 끼 먹고 늘 묵상 기도하며 어디든 걷고 남녀 관계를 줄이는 일이다. 요컨대 '뜻'을 좇아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빈탕한 하느님이고 그것이 인간의 바탈인 한 ‘일좌식 일언인’은 빈탕한 데 맞춰 사는 인간의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