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음력 8월 16일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동초(東樵), 해동초인(海東樵人)이다. 어린 시절에 광주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아버지 최영년(崔永年)이 설립한 시흥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했고, 관립 한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대에 잡지 <신문계(新文界)>와 <반도시론(半島時論)>의 기자로 활동하고 중국 소설집 ≪설부총서(說部叢書)≫를 번역하는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추월색(秋月色)≫을 1912년에 발간한 이후, 1913년 잡지 <신문계>에 금강산 유람기인 <금강은 천연의 공원>을 4∼11월호에 7회 연재했다. 1914년에는 신소설 ≪해안(海岸)≫을 <우리의 가정> 1∼11월호에 연재했고, 신소설 ≪금강문(金剛門)≫과 ≪안의 성≫을 발간했다. 1916년에 신소설 ≪도화원(桃花園)≫을 발간하고, 잡지 <신문계> 8∼9월호에 <세계 절승 금강산>이란 제명으로, 그리고 그해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금강산의 일폭>이란 제명으로 금강산 유람기를 다시 연재했다. <반도시론>에 1917년 5월호에 단편소설 <종소리>를 게재했고, 1918년에 신소설 ≪삼강문(三綱門)≫을, 그리고 1919년에는 신소설 ≪능라도(綾羅島)≫를 발간했다.
1921년 11월에 잡지 <신민공론>에 단편소설 <동정의 눈물>을 발표했다. 1924년에 신소설 ≪춘몽≫을, 그리고 1926년에는 ≪자작부인≫과 ≪용정촌≫을 발간했다. 그 이후부터 문필활동이 눈이 띄지 않는다. 1951년 최익현(崔益鉉)의 실기(實記)를 쓰던 중 1·4후퇴로 피난하다가, 1월 10일 병으로 사망했다.
1970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1988년에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해서, 경희대 국문과에서 대학생활을 했다. 1992∼1995년에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과정을, 그리고 1995∼2003년에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대학원 시절에는 주로 시인론에 주력했다. <김지하의 서정시 연구>를 석사학위 논문으로, <신경림 시의 서사성 연구>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다. 논문 <신경림 시에 나타난 민중의 재해석>, <탈식민적 저항의 서사시>, <1970∼1990년대 민족문학론의 근대성 비판>,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민중시관 재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