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소통하고 싶은 한 소녀의 애절한 외사랑
초등학교 3학년 소녀 미정이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상담실까지 오게 된 아이다. 자기 의견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고 지나치게 위축되어 있어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할 처지에 놓여 있는 아이였다.
“네가 미정이구나. 반갑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탁자 건너편에 마주 앉은 아이는 반응이 없다. 처음 상담실에 들어올 때부터 줄곧 고개를 돌린 채 벽만 바라보고 있다. 행여 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까봐 불안한 듯 아이의 눈은 상담실 벽과 책상 사이를 어색하게 오간다.
차트에 적힌 인적사항을 떠올리며 아이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옆선에 빨강 줄을 댄 연두색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초등학교 3학년 여자 아이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색상인데다 약간 살집이 있는 몸집을 더 뚱뚱해 보이게 하는, 한마디로 외출복으로는 좀 아니다 싶은 옷이다. 머리 또한 대충 손으로 빗어 한 갈래로 묶은 것이 언뜻 보기에도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어설픈 모습이다.<본문중에서>
겉으로 보면 어딘가 모자라는 것도 같고, 불안한 것도 같은 아이, 미정이의 부모는 그런 딸을 모자란 아이로 치부하고 창피하게 여겼다. 그러나 심리검사 결과에 따르면 미정이는 결코 모자란 아이가 아니었다.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잠재력이 우수한 아이였던 것이다.
저자 이보연은 상담을 통해 미정이가 부모의 무시와 냉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그 결과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두려움 많은 아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정이는 안 될 것 같으면 미리 포기하는, 수동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사고가 몸에 밴 아이다. 결과에 대한 집착과 근심이 크다는 증거인데 타고난 성격 탓이라기보다는 결과에 대해 냉정한 비판을 가하는 가정환경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보인다.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성공할까, 실패로 끝날까에 대한 걱정은 누구나 하게 되지만 미정이처럼 극도로 실패를 두려워하여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관적이 되면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
'실패하면 어떡하지? 지난번에도 실패했으니 이번에도 실패할 게 분명해.'
이러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한다면 실제로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본문 중에서>
부모에게 억눌려 주눅 든 아이. 엄마의 관심 저 편에 있는 미정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아도 그저 참고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는 것에만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화나고 슬픈 감정까지 깊숙이 묻어버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렸던 것이다.
저자 이보연은 상담을 통해 미정이의 내면을 이해하는 한편, 아이로 하여금 자신이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놀이를 통해 눈치 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표현하게 하였다. 그 결과 처음에 눈도 못 마주치고 묻는 말에 대답도 못하던 미정이는 차츰 억눌렸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선생님은 어떻게 말 하는지 한번 볼래? 역할을 나누어서 해보자. 나는 공주, 너는 왕자가 되어서 말야.”
“네…”
인형을 받아 손가락에 끼고 내가 공주가 되었다.
왕자 : “난 초라한 공주하고 놀기 싫으니 가버리시오!”
공주 : “흥! 마법에 걸려 잠만 자고 있던 주제에 못된 용을 혼내고 잠에서 깨워준 나를 무시하다니… 그래요 난 더러운 종이봉투를 입었어요. 하지만 외모만 보고 사람을 무시하는 왕자님 같은 사람하고는 나도 안 놀아요!”
대사를 마치자마자 공주는 획 돌아서서 가버린다.
미정이가 손뼉을 치며 하하 웃는다.
“신나하는 걸 보니까 선생님 대사가 마음에 들었나보네?”
미정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젠 미정이 차례야”
우리는 역할을 바꾸기 위해 인형을 교환했다.
왕자 : “다시 예쁘게 하고 와!”
공주 : “치. 바보 왕자님이랑은 안 놀아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한 마디 덧붙이는 미정 공주.
“용에게 또 잡혀가더라도 안 구해 줄 거예요!”
바보왕자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까지 한다.
“어떠니? 생각한 대로 말 한 거 같아?”
“좀 이상하긴 한데요, 속이 시원한 것도 같아요.”
“그래. 하고픈 말을 참지 않고 해버리니까 시원하지?”
“그런 거 같아요.”
멋쩍게 웃는다. <본문 중에서>
억눌린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미정이는 마녀놀이를 통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엄마에 대한 분노를 터뜨린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을 향해 쌓아두었던 벽을 허물어 버린다.
한편, 미정 엄마는 아이가 전에 없이 행동이 거칠어지고 반항한다며 상담을 그만두겠다고 찾아왔으나, 이보연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미정이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미정이 엄마가 나지막하게, 천천히 입을 뗐다.
“지난 번 선생님을 만난 뒤에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미정이는 나의 약한 모습이었어요. 그런 약한 모습이 싫어서, 미정이를 통해 나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게 너무 싫어서 미정이를 야단쳤지요. 그리고 겁이 났답니다. 내가 얻은 것들이 미정이 때문에 망가질까봐서요. 미정이가 태어났을 때, 딸을 낳은 게 큰 죄인 듯 느껴졌어요. 미정이 때문에 남편의 사랑을, 시부모님의 인정을 못 받을까봐 무서웠어요.”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인다. <본문 중에서>
1년 뒤, 4학년이 된 미정이는 또박또박 말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멋진 아이가 되어 상담실을 떠난다. 미정 엄마 역시 미정이 덕분에 자기까지 열등감을 떨치고 당당해졌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마지막 날. 미정이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양 갈래로 단정히 묶은 머리에 앙증맞은 방울을 달고 왔다. 새삼 첫 번 방문 때의 미정이 모습이 떠올랐다. 부스스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소녀가 이렇게 예뻐지다니…. 예쁜 건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다. 반짝이는 눈망울, 충만한 호기심과 긍지가 온 몸에서 풍겨 나오니 예뻐 보일 수밖에….
다시 오지 않을 곳이기에 가슴 속에 깊이 박아두기라는 하려는 듯 미정이는 상담센터 곳곳을 꼼꼼하게 둘러보고는 치료실에 들어선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한다.
“선생님! 제 양말 좀 봐 주세요.”
“응, 분홍 양말을 신고 왔네.”
“이 양말, 기억나세요?”
“그럼. 미정이가 첫날 분홍색 양말을 신고 왔었지. 바로 그 양말이니?”
“네. 바로 그때 신었던 양말이에요.”
“어머! 그 양말을 지금까지 신고 있었던 거야?”
“아뇨. 닳아서 구멍 날까봐 그동안 서랍에 보관하고 있었어요. 오늘은 선생님과 작별하는 날이라서….”
“이 양말이 소중했구나?”
“이 양말이 예쁘다고 하셨잖아요. 그 다음번에 신고 왔을 때도 알아보셨구요.”
“양말이 예뻤던 게 아니야. 미정이 네가 예뻤던 거지.”
“알아요. 이젠 저도 선생님 맘 알거 같아요. 그래두요, 전 이 양말만 보면 선생님이 생각나서 좋아요. 이걸 신으면 기분이 정말 좋아져요. 오래오래 간직할 거예요.”
미정이가 가만히 내 품에 들어와 안긴다. 나도 꼬옥 안아주었다. 보드라운 아이의 몸이 참 싱그럽다. <본문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