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디에서나 부모님을 ‘아버지’ ‘어머니’로 호칭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아버지’ ‘어머니’라 씌어 있었지 전라도 지방에서는 ‘아부지’ ‘어매’라고 불렀다. 서평은 이렇게 부르는 것을 보면 언제 어디서든 서슴지 않고 고쳐 부르도록 했다. 그리고 지방 사람들은 아버지에게는 ‘예’ ‘하십시오’ 같이 존칭을 쓰면서 어머니에게는 어린아이들도 ‘어이’ ‘하소’라며 하대했는데, 서평은 이 또한 그냥 두지 않았다. ‘어이’나 ‘이러소’ ‘저러소’는 양반이 상놈에게 또는 동기간에 쓰는 말이니, 어머니에게는 반드시 ‘예’ ‘하십시오’라는 존칭을 써야 한다고 철저하게 국어 교육을 시켰다. 어머니를 어찌 상놈 취급할 수 있으며 동기처럼 대접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꼭 그렇게 말해야 한다면서 약속의 표시로 1전짜리 동전 다섯 닢을 주곤 했다.--- p.30
서평은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도 특이했다. 그녀에게는 총 14명의 양딸들과 양아들이 있었다. 어째서 서평은 남의 아이들을 그토록 많이 길렀을까? 자신은 영양실조가 될 만큼 못 먹고 헐벗으면서까지 말이다.
그것은 오로지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양딸들과 양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김 씨의 자녀든 이 씨의 자녀든 상관없이, 모든 어린이들이 그녀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이것은 서평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닐 것이다. 서평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어린이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어린이는 순수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평이 어린이를 사랑한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p.65
서평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 해야 된다고 가르치신 예수님 말씀을 더 귀히 여겼다. 내일 나 먹기 위해 오늘 굶는 사람을 본 척 만 척할 수 없으며, 옷장에 옷을 넣어두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람을 버려둘 수는 없다고 했다. 집이야 비만 새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서평의 소신이었다. 그런 생활을 했으니, 그녀가 운명했을 때 남은 소유물이라고는 낡은 담요 반 장과 지갑 안의 27전, 부엌의 강냉이가루 2홉이 전부였다. 통장 잔고 역시 0원이었다. --- p.146
구제가 체질화된 서평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늘 눈에 어른거려 마음이 아팠고, 자신의 남루한 모습은 볼 새도 없었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두 벌 옷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갖가지 병이 생길 만큼 몸은 영양실조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예수 십자가의 신앙’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막을 길이 없었다. 서평은 의학 지식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풍속과 예의에도 밝았다. 그래서 그녀의 설교는 듣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부흥 강사로도 곧잘 초청받았다. --- p.155
서평은 자기 성격이 너무 급하다는 게 고민이었다. 이 성격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늘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너무 급하게 하지 말고 서서히 해야겠다는 결심에서 성을 ‘서’(徐)로 했고 ‘서서히’라는 단어를 보니 ‘서’ 자를 하나 더 써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이름에 들어간 ‘서’(舒)자에는, ‘자기 감정을 차분하게 편다’라는 의미도 있고 ‘소처럼 느릿느릿 여유 있고 침착하게’라는 의미도 있다. ‘평’(平)자 또한 다급한 데서 생긴 모난 성질을 평평하게 해야겠다는 의도를 담았다. 서평은 그만큼 이름에 관심이 많았다. --- p.174
김필례는 서평보다 11세 연하로 같은 금정교회 교인이었다. 게다가 김필례는 수피아여학교 선생이었고 서평은 이일학교 교장이었으니, 인접한 지역의 기독교 학교에서 일하는 이웃 교육자들이었다. 이들은 사역에 있어서도 늘 같이 했다.…김필례는 서평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서평의 마음은 완전히 한국인이었고 성경대로 사는 분이었으며 고아였던 한국 아이를 입양하여 친아들처럼 키웠다.…나는 서평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는 한국 여성 해방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p.195-196
서서평 선교사는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쉴 새 없이 바쁜 생애를 보냈다. 짧은 시간에 실로 많은 일을 해낸 것이다. 한국간호협회와 부인조력회를 조직하여 지도, 운영하였고, 금주동맹을 만들어 거리와 시장에서 계몽운동을 벌였으며, 학교를 세워 손수 가르쳤고, 사경회 강사로 여기저기에서 말씀을 전했고, 구제 사역과 윤락 여성 구출을 위해 빈민촌과 유흥가를 누비고 다녔다. 또한 간호회지 제작 발간, 도서 번역, 집필, 출간, 전도 등으로 바쁜 것은 물론, 주일이면 교회 봉사와 확장주일학교 교사 동원 및 배치 등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움직이고 뛰어다녀야 했다. 이러한 상황인지라 서평은 걷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녔다. 그에게는 ‘걸음 보’(步)자가 무용지물이고 ‘달릴 구’(驅)자만 필요했다. 몸은 항상 말처럼 바쁘게 뛰어다녔고 일은 소처럼 우직하게 우직하게 했다.
광주 제중병원 간호 과장이었던 마가렛 프리챠트는 “그녀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지 안일하게 앉아서 일이나 시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이 건강한 것은 아니었다. 1932년 6월 10일에 한국 교회 각 기관들이 여전도회 후원으로 선교 20주년 기념행사를 했는데, 통례적으로 하는 25주년보다 5년을 앞당긴 것이었다. 왜냐하면 서평의 건강 상태가 도저히 그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p.208-209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서평의 유언이다. 이 유언들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옆에 있던 이들에게 했는데 내가 모아보았다.
모두에게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브라운에게는 “호흡을 거두면 시체를 해부하여 연구 자료로 삼으십시오”, 타마자에게는 “장례 치르고 남은 내 살림은 조화임에게 주십시오”, 조화임에게는 “요셉이를 아들처럼 맡아주세요”, 문안식에게는 “화임과 오래오래 같이 잘 살아요. 결혼 반대한 것 미안하게 생각해요”, 오복희에게는 “광주천 강변 빈민들에게 전도해라”고 말한 것이 서평의 유언이었다.
--- p.226-227